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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4)

상서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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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다
[傳]商曰祀 箕子稱祀 不忘本이라 此年四月歸宗周하여 先告武成하고 次問天道


文王이 천명을 받은 지〉 13(년) 만에 (武王)이 箕子를 찾아가서 〈天道를〉 물으셨다.
나라에서는 〈을〉 ‘’라고 하였으니, 箕子가 ‘’를 칭한 것은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해 4월에 〈武王이〉 宗周로 돌아와서 먼저 武功이 이루어진 것을 〈사당에〉 고하고, 그 다음 〈箕子를 찾아가서〉 天道를 물은 것이다.


역주
역주1 十有三祀 : 孔傳에서 “箕子가 ‘祀’를 칭한 것은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箕子稱祀 不忘本]”라고 풀이하였는데, 明代 馬明衡(≪尙書疑義≫)은 “〈洪範〉의 글에 대하여 注疏에서는 ‘이는 箕子가 武王에게 고한 뒤에 돌아와서 차례대로 엮어 篇을 이루어서 典敎를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이 〈홍범〉편은 모두 箕子의 手筆인 것이다. 蔡註에서도 ‘箕子가 그 뜻을 미루어 더 부연해서 이 〈홍범〉편을 작성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祀」를 칭한 것은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라고 일렀다. 나는 반복 생각하여 그 뜻을 파보았더니, 이 〈홍범〉편은 아마 무왕이 이미 방문을 하고, 기자가 이미 진술을 마치고 난 뒤에, 周나라의 史官이 그 말들을 차례대로 엮어서 〈홍범〉편을 작성한 듯하다. ‘祀’를 칭하고 ‘年’을 칭하지 않은 것은 무왕이 기자가 周나라에 신하 노릇 하지 않는 것을 존경하고, 기자의 道를 존중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商나라의 옛 紀年을 가지고 칭한 듯하니, 이것이 바로 聖人의 大公無我한 마음이다.[洪範之書 注疏以爲 是箕子告武王之後 歸而次敍成篇 以爲典敎 如是則是篇 通是箕子之筆 蔡註亦云 箕子推衍增益 以成篇 故謂稱祀者 不忘本也 愚反覆思之 沈潛其義 是篇蓋武王旣訪 箕子旣陳 周之史官 次第其語而成篇也 稱祀不稱年者 則武王重箕子之不臣 尊箕子之道 故特以商之舊稱之 此聖人大公無我之心也]”라고 하였다.
王夫之(≪尙書稗疏≫)는 “‘十有三祀’에 대하여 孔安國은 ‘箕子가 「祀」라 칭한 것은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라고 하고, 孔穎達은 따라서 ‘이 〈洪範〉편은 史官의 서술이 아니고 바로 箕子가 이미 武王에게 대답하고 나서 물러와 스스로 그 일을 편찬했기 때문에 「祀」라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箕子는 이미 周나라에 신하 노릇 하지 않았으니, 그가 〈洪範〉을 진술할 때에도 스스로 現身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簡編을 찬수하여 〈무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법을 물은 영광을 극대화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周나라의 ‘十三年’을 ‘十三祀’로 삼았으면 벌써 周나라의 正朔을 받든 셈인데, 周나라의 正朔을 받들고서 거기에 商나라 ‘祀’의 호칭을 더하였으니, 명분은 주인을 따르지 않았으나 이미 실속은 잃은 것이다. 또한 그 編年을 사용하면서 한갓 ‘祀’의 한 글자만을 아끼는 것은 바로 큰 것은 놓아두고 작은 것을 다투는 꼴이다. 명칭을 정하고 제도를 개혁하며, 禮를 제정하고 樂을 제작한 것은 모두 周公이 한 일이고, 武王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는 단지 紂의 포학만을 제거하였을 뿐, 湯의 典法은 바꾸지 않았으니, 마치 漢 高祖가 秦나라를 따라 10월을 歲首로 삼은 것과 같을 뿐이다. 武王이 商나라를 쳐서 승리한 뒤에 곧 ‘祀’를 바꾸어 ‘年’으로 칭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泰誓〉에서 ‘年’을 칭한 것은 成王 때에 史官이 追序한 글이고, 여기서 祀를 칭한 것은 武王 때 史官이 記述한 글인데, 어찌 箕子가 商나라를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기 때문이겠는가.[十有三祀 孔安國曰 箕子稱祀 不忘本 孔穎達因謂 此篇非史官敍述 乃箕子旣對武王 退而自撰其事 故稱祀 夫箕子旣不臣周 則其陳洪範也 亦非樂於自見(현) 奈何撰之簡編 以侈其訪道之榮乎 況業以周之十三年 爲十三祀 則已奉周正朔矣 奉周正朔 而加之以商祀之號 名不從乎主人 旣爲失實 且用其編年 而徒愛祀之一字 是舍其大而爭其小 定名革制 秩禮作樂 皆周公之事 終武王之世 則但除紂之虐 而不易湯之典 如漢高帝之沿秦以十月爲歲首 武王於克商之餘 不卽易祀稱年 亦明矣 泰誓之稱年者 成王時 史官追序之詞也 此之稱祀 武王時 史官記述之文也 而豈箕子之以存商也哉]”라고 하였으며, 조선말기의 黃景源(≪江漢集≫ 〈雜著 洪範傳〉)은 “武王이 이미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箕子가 비록 근본을 잊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周나라 ‘十三年’의 ‘年’을 商나라의 ‘祀’로 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武王旣有天下 則箕子雖不忘本 必不以周十三年 稱商之祀也]”라고 하였고, 徐命膺(≪保晩齋叢書≫)은 “殷나라에서는 ‘祀’로, 周나라에서는 ‘年’으로 표기하였는데, 史臣이 장차 武王과 箕子의 問答을 기록하려고 하면서 年數는 周나라를 따라 武王이 大一統한 뜻을 보이고, 年稱은 殷나라를 따라 箕子가 臣僕을 하지 않은 뜻을 밝혔다.[殷曰祀 周曰年 史臣將記武王箕子之問答 而年數則從周以示武王大一統之義 年稱則從殷以明箕子罔臣僕之志]”라고 하였다.
역주2 訪于箕子 : 蔡傳에서 “≪史記≫에 또한 ‘箕子가 洪範을 陳言한 뒤에 武王이 그를 朝鮮에 봉해주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기재하고 있으니, 아마 箕子는 신하가 될 수 없다는 굳은 뜻을 가졌고, 武王 또한 그의 뜻을 존중하여 신하로 삼지 않은 것이다.[史記 亦載箕子陳洪範之後 武王封于朝鮮而不臣也 蓋箕子不可臣 武王亦遂其志而不臣之也]”라고 한 데 대해 吳熙常(≪老洲集≫ 〈讀書隨記〉)은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蔡氏는 司馬遷의 말을 인습하여 세밀히 살펴보지 않은 듯싶다. 대개 ‘道’란 것은 하늘의 주는 바요, 천하의 公物이다 그러므로 武王이 찾아가 道를 묻자, 箕子는 洪範九疇만 진술했을 뿐, 결코 그 封爵은 받지 않았다. 봉해졌는데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사리에 가깝지 않다. 이미 신하가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봉할 수 있겠는가. 그를 봉했다면 어떻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朝鮮은 본래 中國 판도 밖에 있어 일찍부터 服屬하지 않았으니, 武王이 비록 봉하고 싶어도 될 수 있겠는가. 谿谷(張維)이 이른바 ‘箕子가 中國을 떠나 朝鮮에 들어오니, 조선 백성들이 다 같이 그를 높여 임금으로 삼기를 또한 泰伯이 蠻荊에 가서 결국 그 땅에 임금 노릇을 한 것과 같았다.’란 것이 그 실상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竊恐蔡氏因襲史遷之語而不細勘也 盖道者 天之所畀 而天下之公也 故武王訪道 箕子爲陳範疇而已 決不受其封 而封而不臣 尤不近事理 旣不臣之 則何爲封之 抑其封之 則何得曰不臣 且朝鮮 本在中國幅員之外 而曾不服屬 則武王雖欲封之得乎 谿谷所謂箕子去中國而入朝鮮 鮮民共尊以爲君 亦猶泰伯之適蠻荊 而遂君其地也者 可謂得其實矣]”라고 하였다.

상서정의(4) 책은 2020.12.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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