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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1)

상서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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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정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原注
○釋文 凡十六篇이니 十一篇亡하고 五篇見存이라
○《경전석문經典釋文》에 의하면 〈우서虞書〉는 모두 16편이었는데, 11편은 없어지고 5편만 남아 있다.
[疏]‘古文尙書 堯典第一’
[古文尙書 堯典第一]
○正義曰:檢古本竝石經, 直言‘堯典第一’, 無‘古文尙書’.
정의왈正義曰:고본古本석경石經을 살펴보면 단지 ‘요전堯典 제일第一’이라고만 말하였고, ‘고문상서古文尙書’란 것은 없다.
以孔君從隷古, 仍號古文,
그러다가 공군孔君(孔安國)이 예서隷書를 사용해서 고문古文을 적었기 때문에 따라서 고문古文이라고 호칭하였다.
故後人因而題於此, 以別伏生所出, 大‧小夏侯及歐陽所傳爲今文故也.
그러므로 후인後人이 그대로 여기에 적은 것은, 복생伏生이 내놓은 《상서尙書》와 대하후大夏侯(夏侯勝)‧소하후小夏侯(夏侯建) 및 구양歐陽(歐陽和伯)이 전한 《상서尙書》를 금문今文으로 삼은 것과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堯典第一’, 篇之名, 當與衆篇相次.
[堯典第一]편명篇名이니, 응당 여러 들과 함께 서로 차례를 정해야 된다.
第, 訓爲次也. 於次第之內而處一, 故曰“堯典第一.”
차제次第로 풀이하니, 차제次第의 안에서 첫 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요전堯典 제일第一’이라고 한 것이다.
以此第一者, 以五帝之末接三王之初, 典策旣備, 因機成務, 交代揖讓, 以垂無爲, 故爲第一也.
이처럼 ‘제일第一’이라고 한 것은 오제五帝의 말기에서 삼왕三王의 초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전책典策이 이미 갖추어져서 기틀로 인하여 일을 이루고 교대로 읍양揖讓하여 무위無爲의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제일第一로 삼은 것이다.
然書者, 理由舜史勒成一家, 可以爲法.
그러나 《》는 이론理論임금의 사관史官에 의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으로 삼을 만하다.
上取堯事, 下終禪禹, 以至舜終, 皆爲舜史所錄.
위로는 임금의 일을 취하고 아래로는 에게 선양禪讓한 시점에서 끝냈는데, 임금이 끝날 때까지는 모두 임금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다.
其堯‧舜之典, 多陳行事之狀, 其言寡矣.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에는 행사의 상황이 많이 서술되었고, 군신간에 오간 말을 기록한 것이 적다.
禹貢, 卽全非君言準之後代, , 此其一體之異.
우공禹貢〉의 경우는 〈우공禹貢〉편 전부가 후대後代에 준칙이 될 임금의 말은 아니므로 응당 에 들어갈 성질의 것이 못 되니, 이것은 한 체례體例의 다른 점이다.
以此禹之身事於禪, 無入夏書之理.
이는 선양禪讓 받기 이전에 몸소 행한 일이기 때문에 〈하서夏書〉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自甘誓已下, 皆多言辭, 則古史所書, 於是乎始.
감서甘誓〉 이하는 모두 언사言辭가 많으니, 고사古史에 적힌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知五子之歌, 亦非上言.
오자지가五子之歌〉 또한 윗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典書草創, 以義而錄, 但致言有本, 各隨其事.
전서典書초창기草創期에는 를 가지고 기록하였으나 다만 말을 적는 데에 기본이 있으므로 각각 그 일을 따랐을 뿐이다.
[疏]檢其此體, 爲例有十. 一曰典, 二曰謨, 三曰貢, 四曰歌, 五曰誓, 六曰誥, 七曰訓, 八曰命, 九曰征, 十曰範.
체례體例를 살펴보면 열 가지가 있으니, 1은 , 2는 , 3은 , 4는 , 5는 , 6은 , 7은 , 8은 , 9는 , 10은 이다.
堯典‧舜典二篇, 典也. 大禹謨‧皐陶謨二篇, 謨也. 禹貢一篇, 貢也. 五子之歌一篇, 歌也.
요전堯典〉‧〈순전舜典〉 2전체典體요,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 2모체謨體요, 〈우공禹貢〉 1공체貢體요, 〈오자지가五子之歌〉 1가체歌體요,
甘誓‧泰誓三篇‧湯誓‧牧誓‧費誓‧誓八篇, 誓也.
감서甘誓〉‧〈태서泰誓〉 3‧〈탕서湯誓〉‧〈목서牧誓〉‧〈비서費誓〉‧〈진서秦誓〉 8서체誓體요,
仲虺之誥‧湯誥‧大誥‧康誥‧酒誥‧召誥‧洛誥‧康王之誥八篇, 誥也.
중훼지고仲虺之誥〉‧〈탕고湯誥〉‧〈대고大誥〉‧〈강고康誥〉‧〈주고酒誥〉‧〈소고召誥〉‧〈낙고洛誥〉‧〈강왕지고康王之誥〉 8고체誥體요,
伊訓一篇, 訓也. 說命三篇‧微子之命‧蔡仲之命‧顧命‧畢命‧冏命‧文侯之命九篇, 命也.
이훈伊訓〉 1훈체訓體요, 〈열명說命〉 3‧〈미자지명微子之命〉‧〈채중지명蔡仲之命〉‧〈고명顧命〉‧〈필명畢命〉‧〈경명冏命〉‧〈문후지명文侯之命〉 9명체命體요,
胤征一篇, 征也. 洪範一篇, 範也.
윤정胤征〉 1정체征體요, 〈홍범洪範〉 1범체範體이다.
此各隨事而言.
이것은 각각 일에 따라 말한 것이다.
益稷, 亦謨也, 因其人稱言以別之.
익직益稷〉도 모체謨體이니, 그 사람의 칭언稱言을 인하여 구별한 것이다.
其太甲‧咸有一德, 伊尹訓道王, 亦訓之類.
태갑太甲〉‧〈함유일덕咸有一德〉은 이윤伊尹훈도訓導한 것이니 역시 훈체訓體이다.
盤庚, 亦誥也, 故王肅云 “不言誥, 何也.
반경盤庚〉 역시 고체誥體이기 때문에 왕숙王肅이 “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取其而立功, 非但錄其誥.”
그 도읍을 옮겨 을 세운 점을 취한 것이니, 단지 그 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高宗肜日, 與訓序連文, 亦訓辭可知也.
고종융일高宗肜日〉은 훈서訓序와 글을 연결하였으니, 역시 훈사訓辭라는 것을 알 수 있다.
西伯戡黎云 “祖伊恐, 奔告于受.” 亦誥也. 武成云 “.” 亦誥也.
서백감려西伯戡黎〉에 “조이祖伊가 두려워서 달려가 주왕紂王 에게 고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고체誥體요, 〈무성武成〉에 “그 정사를 기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고체誥體이다.
여오旅獒〉는 을 경계한 내용이니, 역시 훈체訓體이다.
金縢自爲一體, 祝亦誥辭也.
금등金縢〉은 스스로 한 체례體例가 되었으니, 책축冊祝의 글 역시 고사誥辭이다.
梓材, 酒誥分出, 亦誥也.
재재梓材〉와 〈주고酒誥〉가 나누어져 나왔으니, 역시 고체誥體이다.
多士以王命誥, 自然誥也.
다사多士〉는 왕명王命을 가지고 고하였으니, 자연히 고체誥體이다.
無逸戒王, 亦訓也.
무일無逸〉은 을 경계하였으니, 역시 훈체訓體이다.
君奭周公誥召公, 亦誥也.
군석君奭〉은 주공周公소공召公에게 고한 것이니, 역시 고체誥體이다.
多方‧周官上誥於下, 亦誥也.
다방多方〉과 〈주관周官〉은 위에서 아래에 고한 것이니, 역시 고체誥體이다.
君陳‧君牙與畢命之類, 亦命也.
군진君陳〉‧〈군아君牙〉 및 〈필명畢命〉의 도 역시 명체命體이다.
呂刑陳刑告王, 亦誥也.
여형呂刑〉은 형벌을 벌여 에게 고하였으니, 역시 고체誥體이다.
[疏]書篇之名, 因事而立, 旣無體例, 隨便爲文.
》의 편명篇名은 일로 인해 설립하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체례體例가 없고 편의에 따라 글을 작성하였다.
次第, 於序, 孔‧鄭不同.
100편의 차례는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 공안국孔安國정현鄭玄이 동일하지 않았다.
孔以湯誓在夏社前, 於百篇, 爲第二十六, 鄭以爲在臣扈後, 第二十九.
공안국孔安國은 〈탕서湯誓〉를 〈하사夏社〉의 앞에 두어 100편에서 제26이 되게 하였고, 정현鄭玄은 〈탕서湯誓〉를 〈신호臣扈〉 뒤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29가 되게 하였다.
孔以咸有一德次太甲後第四十, 鄭以爲在湯誥後第三十二.
공안국孔安國은 〈함유일덕咸有一德〉을 〈태갑太甲〉의 뒤에 두어 제40이 되게 하였고, 정현鄭玄은 〈함유일덕咸有一德〉을 〈탕고湯誥〉의 뒤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32가 되게 하였다.
孔以蔡仲之命次君奭後第八十三, 鄭以爲在費誓前第九十六.
공안국孔安國은 〈채중지명蔡仲之命〉을 〈군석君奭〉의 뒤에 두어 제83이 되게 하였고, 정현鄭玄은 〈채중지명蔡仲之命〉을 〈비서費誓〉의 앞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96이 되게 하였다.
孔以周官在立政後第八十八, 鄭以爲在立政前第八十六.
공안국孔安國은 〈주관周官〉을 〈입정立政〉의 뒤에 두어 제88이 되게 하였고, 정현鄭玄은 〈주관周官〉을 〈입정立政〉 앞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86이 되게 하였다.
孔以費誓在文侯之命後第九十九, 鄭以爲在呂刑前第九十七.
공안국孔安國은 〈비서費誓〉를 〈문후지명文侯之命〉 뒤에 두어 제99가 되게 하였고, 정현鄭玄은 〈비서費誓〉를 〈여형呂刑〉 앞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97이 되게 하였다.
不同者, 孔依壁內篇次及序爲文, 鄭依賈氏所奏別錄爲次.
동일하지 않은 이유는, 공안국孔安國공벽孔壁 속에 있던 《》의 편차篇次에 의하여 글을 작성하였고, 정현鄭玄가씨賈氏가 아뢴 《별록別錄》에 의하여 차례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孔未入學官, 以此不同.
공안국孔安國학관學官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考論次第, 孔義是也.
그러나 차제次第를 상고해 논한다면 공안국孔安國의 뜻이 옳다.
虞書
虞書
[疏]正義曰:堯典, 雖曰唐事, 本以虞史所錄, 末言舜登庸由堯,
정의왈正義曰:〈요전堯典〉은 비록 의 일이나 본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끄트머리에 의 등용이 임금에 의한 것임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을 소급하여 을 지었고,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서虞書〉라 이른 것이다.
鄭玄云 “舜之美事, 在於堯時.” 是也.
정현鄭玄이 말한 “의 아름다운 일이 임금의 시대에 있었다.”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案馬融‧鄭玄‧王肅‧別錄, 題皆曰 虞夏書, 以虞‧夏同科, 雖虞事亦連夏.
상고하건대 마융馬融정현鄭玄왕숙王肅 그리고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서 제목을 모두 〈우하서虞夏書〉라고 한 것은 가 같은 이기 때문에 비록 의 일이라도 또한 에 연계할 수 있었다.
此直言虞書, 本無書之題也.
그러나 여기서 단지 〈우서虞書〉라고만 말한 것은 본래 〈하서夏書〉란 제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案鄭序以爲虞夏書二十篇, 商書四十篇, 周書四十篇, 贊云 “.” 是虞‧夏同科也.
상고하건대 정현鄭玄서서書序에는 〈우하서虞夏書〉 20, 〈상서商書〉 40, 〈주서周書〉 40으로 규정하고, 에 이르기를 “삼과三科의 조목과 오가五家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가 같은 인 것이다.
其孔於禹貢註云 “禹之王以是功,
공안국孔安國은 〈우공禹貢〉의 에서 “이 된 것이 이 때문이었다.
.” 則虞‧夏別題也.
그러므로 〈하서夏書〉의 첫머리에 놓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가 제목을 구별하게 되었다.
以上爲虞書則十六篇.
이상에서 〈우서虞書〉로 삼은 것은 16이다.
又帝告‧釐沃‧湯征‧汝鳩‧汝方於鄭玄爲商書, 而孔竝於胤征之下, 或以爲夏事, 猶西伯戡黎, 則夏書九篇, 商書三十五篇, 此與鄭異也.
또 〈제고帝告〉‧〈이옥釐沃〉‧〈탕정湯征〉‧〈여구汝鳩〉‧〈여방汝方〉이 정현鄭玄에게서는 〈상서商書〉가 되었고, 공안국孔安國은 〈윤정胤征〉의 아래에 합하였으니, 혹시 의 일을 마치 〈서백감려西伯戡黎〉처럼 여겼다면 〈하서夏書〉가 9, 〈상서商書〉가 35이니, 이것은 정현鄭玄과 다르다.
或孔因帝告以下五篇亡, 竝註於夏書不廢, 猶商書乎.
혹시 공안국孔安國은 〈제고帝告〉 이하 5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하서夏書〉에 아울러 주를 달아서 폐하지 않기를 마치 〈상서商書〉와 같이 한 것인가?
별문別文에서 인용한 것은 모두 ‘우서왈虞書曰’‧‘하서왈夏書曰’이라고 했지, 아울러서 〈우하서虞夏書〉라고 말한 경우는 없다.
[疏]又伏生雖有一虞夏傳, 以外亦有虞傳‧夏傳, 此其所以宜別也.
복생伏生은 비록 하나의 〈우하전虞夏傳〉을 두었으나 이외에 또한 〈우전虞傳〉‧〈하전夏傳〉을 두었으니, 이것은 마땅히 구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此孔依虞‧夏各別而存之.
이래서 공안국孔安國에 따라 각각 구별해서 존치한 것이다.
莊八年左傳曰 “皐陶邁種德.” 僖二十四年左傳引夏書曰 “地平天成.”
장공莊公 8년 조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하서夏書〉의 “고요皐陶는 힘써 덕을 펴서”라는 말을 인하였고, 희공僖公 24년 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하서夏書〉의 “땅이 다스려지고 하늘이 이루어졌다.”라는 말을 인용하였고,
二十七年引夏書 “.” 襄二十六年引夏書曰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27년 조에는 〈하서夏書〉의 “각각 말을 하게 해서 받아들였다.”라는 말을 인용하였고, 양공襄公 26년 조에는 〈하서夏書〉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는 편이 낫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皆在大禹謨‧皐陶謨, 當云虞書而云夏書者, 以事關禹, 故引爲夏書.
〈이 말들은〉 모두 〈대우모大禹謨〉와 〈고요모皐陶謨〉에 있으니, 응당 〈우서虞書〉라고 해야 할 터인데, 〈하서夏書〉라고 한 것은 일이 에 관계되기 때문에 인용에서 〈하서夏書〉라고 한 것이다.
홍범洪範〉의 경우는 〈주서周書〉이지만, 기자箕子나라에 이르러 나라 사람 자격으로서 베푼 것이기 때문에 에서 인용할 때 곧 〈상서商書〉라고 한 것이다.
[疏]案壁內所得, 孔爲傳者凡五十八篇, 爲四十六卷. 三十三篇與鄭注同, 二十五篇增多鄭注也.
상고하건대 속에서 얻은 것은, 공안국孔安國을 단 것이 모두 58편에 46권인데, 33편은 정주鄭注의 것과 같고, 25편은 정주鄭注의 것보다 더 많다.
其二十五篇者, 大禹謨一, 五子之歌二, 胤征三, 仲虺之誥四, 湯誥五, 伊訓六, 太甲三篇九, 咸有一德十, 說命三篇十三, 泰誓三篇十六, 武成十七, 旅獒十八, 微子之命十九, 蔡仲之命二十, 周官二十一, 君陳二十二, 畢命二十三, 君牙二十四, 冏命二十五.
그 25편이란 것은 〈대우모大禹謨〉 1, 〈오자지가五子之歌〉 2, 〈윤정胤征〉 3, 〈중훼지고仲虺之誥〉 4, 〈탕고湯誥〉 5, 〈이훈伊訓〉 6, 〈태갑太甲〉 3편 9, 〈함유일덕咸有一德〉 10, 〈열명說命〉 3편 13, 〈태서泰誓〉 3편 16, 〈무성武成〉 17, 〈여오旅獒〉 18, 〈미자지명微子之命〉 19, 〈채중지명蔡仲之命〉 20, 〈주관周官〉 21, 〈군진君陳〉 22, 〈필명畢命〉 23, 〈군아君牙〉 24, 〈경명冏命〉 25를 말한다.
但孔君所傳, 値巫蠱不行以終.
다만 공안국孔安國을 단 것은 무고巫蠱 사건을 만나 행해지지 못하고 끝났다.
前漢諸儒知孔本有五十八篇, 不見孔傳,
전한前漢 제유諸儒공안국孔安國에 58편이 있는 것은 알고 공전孔傳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遂有張霸之徒, 於鄭註之外, 僞造尙書凡二十四篇, 以足鄭註三十四篇, 爲五十八篇.
드디어 장패張霸의 무리가 있어 정주鄭註 이외에 《상서尙書》 24편을 위조하여 정주鄭註의 34편에 채워서 58편을 만들었다.
其數雖與孔同, 其篇有異.
그 숫자는 비록 공안국孔安國의 것과 같지만, 그 편에는 차이가 있다.
孔則於伏生所傳二十九篇內, 無古文泰誓, 除序尙二十八篇, 分出舜典‧益稷‧盤庚二篇‧康王之誥爲三十三, 增二十五篇爲五十八篇.
공안국孔安國의 경우, 복생伏生이 전한 29편 속에는 고문古文의 〈태서泰誓〉가 없으므로 그 를 제하고도 오히려 28편인데, 〈순전舜典〉‧〈익직益稷〉‧〈반경盤庚〉 2편‧〈강왕지고康王之誥〉를 갈라내어 33편을 만들고 25편을 보태서 58편을 만들었다.
鄭玄則於伏生二十九篇之內, 分出盤庚二篇‧康王之誥‧又泰誓三篇, 爲三十四篇, 更增益僞書二十四篇, 爲五十八.
정현鄭玄의 경우는 복생伏生의 29편 속에서 〈반경盤庚〉 2편‧〈강왕지고康王之誥〉 그리고 또 〈태서泰誓〉 3편을 갈라내어 34편을 만들고 다시 위서僞書 24편을 보태서 58편을 만들었다.
所增益二十四篇者, 則鄭註書序, 舜典一, 汩作二, 九共九篇十一, 大禹謨十二, 益稷十三, 五子之歌十四, 胤征十五, 湯誥十六, 咸有一德十七, 典寶十八, 伊訓十九, 肆命二十, 原命二十一, 武成二十二, 旅獒二十三, 冏命二十四.
보탠 24편의 경우는 정주鄭註서서書序, 〈순전舜典〉 1, 〈율작汩作〉 2, 〈구공九共〉 9편 11, 〈대우모大禹謨〉 12, 〈익직益稷〉 13, 〈오자지가五子之歌〉 14, 〈윤정胤征〉 15, 〈탕고湯誥〉 16, 〈함유일덕咸有一德〉 17, 〈전보典寶〉 18, 〈이훈伊訓〉 19, 〈사명肆命〉 20, 〈원명原命〉 21, 〈무성武成〉 22, 〈여오旅獒〉 23, 〈경명冏命〉 24이다.
以此二十四爲十六卷, 以九共九篇共卷, 除八篇, 故爲十六.
이 24편으로 16권을 만들었는데, 〈구공九共〉 9편을 같은 권으로 만들어 8편을 제했기 때문에 16권이 된 것이다.
故藝文志‧劉向別錄云 “五十八篇.”
그러므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와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 이르기를 “58편이다.”라고 한 것이다.
藝文志又云 “孔安國者, 孔子後, 悉得其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또 이르기를 “공안국孔安國공자孔子의 후손으로서 그 책을 다 얻었으니, 고문古文으로써 또 16편이 많아졌다.”라고 하였다.
篇卽卷也. 卽是僞書二十四篇也.
은 곧 인데, 바로 이 위서僞書 24편이다.
劉向作別錄, 班固作藝文志竝云此言, 不見孔傳也.
유향劉向이 지은 《별록別錄》과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모두 적고 있는 이 말은 공전孔傳에 보이지 않는다.
[疏]劉歆三統歷, 論武王伐紂, 引今文泰誓云 “丙午逮師.”
유흠劉歆이 지은 《삼통력三統歷》에서 무왕武王를 친 일을 논할 때에 〈금문태서今文泰誓〉에 “병오일丙午日군중軍中에 이르렀다.”라는 말을 인용하였고,
又引武成 “越若來三月五日甲子, 咸劉商王受.”
또 〈무성武成〉에 “3월 5일 갑자甲子에 모두 상왕商王 를 무찔렀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竝不與孔同, 亦不見孔傳也.
모두 공안국孔安國과 같지 않으니, 또한 공전孔傳을 보지 못한 것이다.
後漢初賈逵奏尙書疏云 “流爲烏.” 是與孔亦異也.
후한後漢 초기 가규賈逵의 〈주상서소奏尙書疏〉에 “흘러가 까마귀가 되었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것 역시 공안국孔安國과 달랐다.
馬融書序云 “經傳所引泰誓, 竝無此文.” 又云 “逸十六篇, .” 是融亦不見也.
마융馬融서서書序에 “경전經傳에서 〈태서泰誓〉를 인용했지만 〈태서泰誓〉에 모두 이러한 글이 없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일서逸書 16편은 전혀 사설師說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융馬融 또한 공전孔傳을 보지 못한 것이다.
服虔‧杜預註左傳 “亂其紀綱.” 竝云 “夏桀時.” 服虔‧杜預, 皆不見也.
복건服虔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그 기강紀綱을 어지럽혔다.”에 주를 달면서 모두 이르기를 “나라 걸왕桀王의 때였다.”라고 하였으니, 복건服虔두예杜預 모두 공전孔傳을 보지 못한 것이다.
鄭玄亦不見之, 故註書序‧舜典云 “入麓伐木.” 註五子之歌云 “避亂於洛汭.”
정현鄭玄 또한 공전孔傳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서書序와 〈순전舜典〉에 주를 달기를 “산록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었다.”라고 하였고, 〈오자지가五子之歌〉에 주를 달기를 “낙예洛汭에서 피란하였다.”라고 하였고,
註胤征云 “胤征, 臣名.” 又註禹貢, 引胤征云 “厥匪玄黃, 昭我周王.” 又註咸有一德云 “伊陟臣扈曰”
윤정胤征〉에 주를 달기를 “윤정胤征은 신하 이름이다.”라고 하였고, 또 〈우공禹貢〉에 주를 달 때에 〈윤정胤征〉을 끌어서 “광주리에 담아 바치는 폐백은 검은 비단과 누런 비단으로 우리 주왕周王을 빛냈다.”라고 하였고, 또 〈함유일덕咸有一德〉에 주를 달기를 “이척伊陟신호臣扈가 말하기를”이라고 하였고,
又註典寶, 引伊訓云 “載孚在亳.” 又曰 “征是三朡.” 又註旅獒云 “獒讀曰豪, 謂是遒豪之長.”
또 〈전보典寶〉에 주를 달 때에 〈이훈伊訓〉을 끌어서 “믿음을 가지고 에 있었다.”라고 하고, 또 “삼종三朡을 정벌했다.”라고 하였고, 또 〈여오旅獒〉에 주를 달기를 “로 발음해서 읽어야 하니, 이것은 주호遒豪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又古文有仲虺之誥‧太甲‧說命等見在而云亡, 其汩典‧典寶之等一十三篇, 見亡而云已逸, 是不見古文也.
그리고 또 고문古文에 〈중훼지고仲虺之誥〉‧〈태갑太甲〉‧〈열명說命〉 등이 있어 현재 전하고 있는데도 없어졌다고 하였고, 그 〈율전汩典〉‧〈전보典寶〉 등 13편이 현재 없어졌는데도 이미 일실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고문古文을 보지 못한 소치이다.
[疏]案伏生所傳三十四篇者, 謂之今文, 則夏侯勝‧夏侯建‧歐陽和伯等三家所傳及後漢末蔡邕所勒石經是也.
상고하건대 복생伏生이 전한 34편을 금문今文이라 이른 것은 하후승夏侯勝하후건夏侯建구양화백歐陽和伯삼가三家가 전한 것과 후한後漢 말기에 채옹蔡邕이 새긴 석경石經이 바로 그것이다.
孔所傳者, 膠東庸生‧劉歆‧賈逵‧馬融等所傳是也.
공안국孔安國이 전한 것은 교동膠東 용생庸生유흠劉歆가규賈逵마융馬融 등이 전한 바가 바로 그것이다.
정현鄭玄의 〈서찬書贊〉에 “우리 선사先師극자하생棘子下生 안국安國 또한 이 을 좋아하셨고, 위굉衛宏가규賈逵마융馬融 등 여러 군자君子고아高雅한 재주와 옛것을 좋아하는 박식이 이미 베풀어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又云 “歐陽氏失其本義, 今疾此蔽冒, 猶復疑惑未悛.”
또 이르기를 “구양씨歐陽氏가 그 본뜻을 잃었거늘 이 가려짐을 미워하면서 지금 오히려 다시 의혹疑惑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是鄭意師祖孔學, 傳授膠東庸生‧劉歆‧賈逵‧馬融等學, 而賤夏侯‧歐陽等, 何意鄭註尙書, 亡逸竝與孔異, 篇數竝與三家同.
이는 바로 정현鄭玄의 생각에는 사조師祖 공학孔學교동膠東 용생庸生유흠劉歆가규賈逵마융馬融 등에게 전수된 것으로 여기고 배우면서 하후夏侯구양歐陽 등을 천시한 것인데, 무슨 뜻으로 정현鄭玄이 《상서尙書》를 주낼 때에 망일亡逸 문제는 공안국孔安國과 다르게 하고 편수篇數 문제는 삼가三家와 같게 하였는가.
유흠劉歆가규賈逵마융馬融 등이 모두 공학孔學을 전하였건만, “16편이 일실되었다.”고 하여 공안국孔安國과 다르게 한 동기는 진실로 공안국孔安國를 낸 뒤에 그 책이 산일散逸하여 전주傳註가 행해지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다.
以庸生‧賈‧馬之等, 惟傳孔學經文三十三篇, 故鄭與三家同以爲古文, 而鄭承其後, 所註皆同賈逵‧馬融之學, 題曰古文尙書, 篇與夏侯等同, 而經字多異.
용생庸生가규賈逵마융馬融 등은 오직 공학경문孔學經文 33편만을 전하였기 때문에 정현鄭玄삼가三家와 함께 고문古文으로 삼았고, 정현鄭玄이 그 뒤를 이었으니, 를 단 것이 모두 가규賈逵마융馬融과 같았으므로 제목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한 것인데, 하후夏侯 등과 같았으나 의 글자는 대부분 달랐다.
[疏]夏侯等書宅嵎夷爲宅嵎鐵, 昧谷曰柳谷, 心腹腎腸曰, 劓刵劅剠云臏宮劓割頭庶剠,
하후夏侯 등은 ‘택우이宅嵎夷’를 ‘택우철宅嵎鐵’이라고 적고, ‘매곡昧谷’을 ‘유곡柳谷’, ‘심복신장心腹腎腸’을 ‘우현양優賢揚’, ‘의이탁경劓刵劅剠’을 ‘빈궁의할두서경臏宮劓割頭庶剠’이라고 하였다.
是鄭註不同也.
그래서 정현鄭玄가 같지 않은 것이다.
三家之學, 傳孔業者.
삼가三家공업孔業을 전한 것이다.
漢書儒林傳云 “安國傳都尉朝子俊, 俊傳膠東庸生, 生傳淸河胡常, 常傳徐敖, 敖傳王璜及塗惲, 惲傳河南桑欽.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공안국孔安國도위都尉 조자준朝子俊에게 전하고, 조자준朝子俊교동膠東 용생庸生에게 전하고, 용생庸生청하淸河 호상胡常에게 전하고, 호상胡常서오徐敖에게 전하고, 서오徐敖왕황王璜도운塗惲에게 전하고, 도운塗惲하남河南 상흠桑欽에게 전하였다.
至後漢初衛‧賈‧馬亦傳孔學.”
후한後漢 에 이르러 위굉衛宏가규賈逵마융馬融이 또한 공학孔學을 전했다.”라고 하였다.
故書贊云 “自世祖興後漢, 衛‧賈‧馬二三君子之業.” 是也.
그러므로 〈서찬書贊〉에 “세조世祖후한後漢을 일으킴으로부터 위굉衛宏가규賈逵마융馬融 등 여러 군자君子”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所得傳者三十三篇古經, 亦無其五十八篇, 及傳說絶無傳者.
얻어 전한 것은 33편의 고경古經인데, 또한 그 58편이 없어지고 전설傳說에도 전연 전자傳者가 없었다.
至晉世王肅註書, 始似竊見孔傳,
그러다가 나라 시대에 이르러 왕숙王肅이 《》를 낼 때 비로소 공전孔傳을 살며시 본 것 같았다.
故註“亂其紀綱.” 爲夏太康時.
그러므로 에 “그 기강을 어지럽혔다.”는 시기를 나라 태강太康 때로 비정하였다.
又晉書皇甫謐傳云 “. 往往載孔傳五十八篇之書.”
또 《진서晉書》 〈황보밀전皇甫謐傳〉에 “고모의 아들 외제外弟 양류梁柳가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기 때문에 《제왕세기帝王世紀》를 지었으니, 이따금 공전孔傳 58편의 책이 실려 있다.”라고 하였다.
[疏]晉書又云 “晉太保公鄭沖, 以古文授扶風蘇愉, 愉字休預.
진서晉書》에 또 이르기를 “나라 태보공太保公 정충鄭沖이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부풍扶風 소유蘇愉에게 전수하였는데, 소유蘇愉휴예休預이다.
預授天水梁柳, 字洪季, 卽謐之外弟也.
휴예休預천수天水 양류梁柳에게 전수하였는데, 양류梁柳홍계洪季로 곧 황보밀皇甫謐외제外弟이다.
季授城陽臧曹, 字彦始.
홍계洪季성양城陽 장조臧曹에게 전수하였는데, 장조臧曹언시彦始이다.
始授郡守子汝南梅賾, 字仲眞, 又爲豫章內史, 遂於前晉, 奏上其書而施行焉.” 時已亡失舜典一篇, 晉末范甯爲解時, 已不得焉.
언시彦始군수郡守의 아들 여남汝南 매색梅賾에게 전수하였는데, 매색梅賾중진仲眞이고, 또 예장내사豫章內史가 되었으며, 드디어 전진前晉에서 그 책을 상주上奏하여 시행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미 〈순전舜典〉 1편이 없어졌고, 나라 말기 범녕范甯이 주해할 때에 이미 얻지 못하였다.
至齊蕭鸞建武四年, 姚方興, 於大航頭得而獻之, 議者以爲孔安國之所註也.
남제南齊 소란蕭鸞 건무建武 4년(497)에 이르러 요방흥姚方興이 큰 배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어 바쳤더니, 의자議者들이 “공안국孔安國이 주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値方興有罪, 事亦隨寢.
요방흥姚方興이 죄를 짓는 바람에 일이 또한 따라서 침체되었다.
至隋開皇二年, 購遺典, 乃得其篇焉.
나라 개황開皇 2년(582)에 이르러 유전遺典구모購募하여 이에 그 를 얻었다.
然孔註之後, 歷及後漢之末, 無人傳說, 至晉之初, 猶得存者.
그러나 공안국孔安國를 단 뒤 후한後漢 말기에 이르러 전설傳說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라 초기에 이르러 오히려 보존된 것을 얻었다.
雖不列學官, 散在民間, 事雖久遠, 故得猶存.
비록 학관學官열립列立되지는 못했지만, 민간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오히려 보존될 수가 있었다.
原注
孔氏傳
孔氏傳
卽註也 以傳述爲義니라
이 곧 이니 전술傳述로 뜻을 삼는다.
舊說 漢已前稱傳이라
구설舊說에 “나라 이전에는 으로 칭했다.”라고 하였다.
[疏]正義曰:以注者多門, 故云其氏, 以別衆家.
정의왈正義曰:주자注者문호門戶가 많기 때문에 그 를 말해서 여러 주자注者를 구별하였다.
或當時自題孔氏, 亦可以後人辨之.
혹은 당시에 스스로 공씨孔氏라고 적어서 또한 후인後人이 분별할 수 있게 하였다.
역주
역주1 不應入書 : 書는 〈虞書〉인지 〈夏書〉인지 또는 어떤 다른 책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역주2 (後)[前] : 저본에는 ‘後’로 되어있으나, 禹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前’자의 잘못인 듯하므로 ‘前’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泰)[秦] : 저본에는 ‘泰’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泰는 마땅히 秦이 되어야 한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秦’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徒)[徙] : 저본에는 ‘徒’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徒는 마땅히 徙가 되어야 한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徙’로 바로잡았다.
역주5 識其政事 : 〈武戌〉의 書序에 보인다.
역주6 旅獒戒王 亦訓也 : 《書經輯傳》 〈旅獒〉의 序에 “召公이 글을 지어 武王을 경계하였으니, 역시 訓體이다.[召公作書以戒武王 亦訓體]”라고 보인다.
역주7 百篇 : 흔히들 孔壁本 《尙書》 100편을 가리킨다.
역주8 堯典……故謂之虞書也 : 麗末鮮初의 權近은 그의 《書淺見錄》에서 “〈堯典〉은 虞나라 史官이 지은 것이므로 〈虞書〉라고 하고, 〈舜典〉 이하는 夏나라 史官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夏書〉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내가 상고하건대 역사를 修撰하는 法은 모두 후세 사람에 의해 정해지기는 하나 그 서명을 前代로 해야 함은 글은 비록 후세에 이루어지지만 일은 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班固는 後漢에 있어서 前漢의 역사를 수찬하였는데, 그 서명은 ‘《前漢書》’라고 칭하였고, 范祖禹는 宋나라에 있어서 唐나라의 역사를 편찬하였으나 그 서명은 ‘《唐鑑》’이라고 한 것들이 모두 이것이다. 그렇다면 〈堯典〉은 虞나라 사관에 의해 지어졌으나 당연히 ‘《唐書》’라고 해야 하고, 〈舜典〉 이하는 夏나라 사관이 지었으나 당연히 ‘《虞書》’라고 해야 할 것이다.
〈大禹謨〉 한 편만은 〈漢高祖紀〉의 例와 같으니, 당연히 〈夏書〉의 첫머리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春秋傳》에서도 대부분 ‘〈夏書〉’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 기록된 내용은 禹가 즉위한 이후의 일이 아니고 곧 皐陶, 伯益과 함께 帝舜의 앞에서 정사를 논한 것이므로 이것은 모두 虞나라 조정에서 있었던 임금과 신하의 嘉言과 善政일 뿐인데, 어떻게 〈夏書〉라 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자도 일찍이 이 점에 대해 의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權近의 說破에 동의한다.
역주9 (尙)[夏] : 저본에는 ‘尙’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浦鏜이 이르기를 ‘尙은 夏자의 오자이다.’ 하였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夏’로 바로잡았다.
역주10 三科之條 五家之敎 : 經學家에서 唐‧虞‧夏‧殷‧周의 文體를 구별하는 기준이다. 三科는 곧 虞‧夏가 一科, 商이 一科, 周가 一科라는 것이고, 五家는 곧 唐이 一家, 虞가 一家, 夏가 一家, 殷이 一家, 周가 一家라는 것이다.
역주11 禹之王以是功 故爲夏書之首 : 孔傳에는 “이것은 堯임금 때의 일인데 〈夏書〉 첫머리에 놓였으니, 禹가 왕이 된 것이 이 功 때문이었다.[此堯時事 而在夏書之首 禹之王 以是功]”로 되어있다.
역주12 堯典……無竝言虞夏書者 : 淸代 閻若璩의 《尙書古文疏證》에 “상고하건대 〈虞書〉와 〈夏書〉가 나뉜 것은 실로 孔安國의 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馬融‧鄭康成‧王肅 그리고 劉向의 《別錄》에서 제목을 〈虞夏書〉라고 하여 구별이 없이 칭한 것은 孔穎達이 이른바 ‘虞‧夏가 같은 科이기 때문에 비록 虞의 일이라도 夏에 연계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곧 伏生은 〈虞傳〉과 〈夏傳〉 이외에 따로 하나의 〈虞夏傳〉을 두었고, 鄭康成은 書序에서 또 〈虞夏書〉는 20篇, 〈商書〉는 40篇, 〈周書〉는 40篇으로 규정하고 贊에 이르기를 ‘三科의 조목과 五家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虞‧夏가 같은 科이다.
나는 揚子의 《法言》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또한 ‘虞‧夏의 글은 渾渾하고, 〈商書〉는 灝灝하고, 〈周書〉는 噩噩하다.’고 하였으니, 西漢 때에는 〈虞書〉와 〈夏書〉를 구별하여 둘로 만든 일이 없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杜元凱가 《春秋左氏傳》의 僖公 27년 조에 인용된 〈夏書〉의 ‘賦納以言 明試以功 車服以庸’이란 3句에 대한 註에서 ‘尙書 虞夏書’라고 하였으니, 西晉 때에 〈虞書〉와 〈夏書〉를 구분해서 둘로 만든 일이 없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東晉에 와서 梅賾의 책이 나온 연후에 書題‧卷數‧篇名이 모두 그 옛것을 어지럽혔다.”라고 하여 孔穎達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역주13 (云)[引] : 저본에는 ‘云’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宋本과 毛本에는 ‘云’이 ‘引’으로 되어있으니, 살펴보건대 ‘引’자가 옳다.”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引’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夏書 : 宋末元初의 朱申(字 唐翁, 號 魯齋)은 《春秋左氏傳》 莊公 8년 조의 附注에서 “이것은 〈虞書 大禹謨〉의 글인데, 〈夏書〉라고 한 것은 아마 공자가 書를 刪定하기 전에는 명칭을 ‘夏書’라고 했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역주15 賦納以言 : 지금 전하는 《尙書正義》와 《書經集傳》에는 〈虞書 益稷〉에 보인다.
역주16 若洪範以爲周書……卽曰商書也 : 宋代 章如愚가 編한 《群書考索續集》 권4 〈經籍門 書〉에 “〈洪範〉은 〈周書〉이지만, 箕子가 본래 商나라 사람으로서 베푼 것이기 때문에 傳에서 그를 인용하면서 곧 〈商書〉라고 한 것이다.[洪範以爲周書 以箕子本商人所陳 而傳引之 卽曰商書]”라는 말을 미루어보면, 여기의 ‘以箕子至周 商人所陳’은 ‘箕子至周 以商人所陳’으로 되어야 할 것 같다.
역주17 以古文又多十六篇 : 《漢書》 〈藝文志〉에는 “29편에 비교하여 16편이 더 많아졌다.[以考二十九篇 得多十六篇]”로 되어있다.
역주18 泰誓 : 阮刻本에 “‘泰誓’ 2자가 없으면 漢나라 때의 〈泰誓〉를 經傳에 인용한 일이 있지 않음을 이르고, 만약 ‘泰誓’ 2자가 있으면 經傳에 인용한 〈泰誓〉의 내용이 漢나라 때의 〈泰誓〉에는 모두 보이지 않음을 이르니, 두 가지 뜻이 모두 통한다.”라고 하였다.
역주19 絶無師說 : 淸代 毛奇齡의 《古文尙書怨詞》에 “‘전혀 師說이 없다.’는 것은 傳注를 한 것이 없음을 이른다.[絶無師說 謂無爲傳注]”라고 풀이하였다.
역주20 我先師棘子下生安國 : 魏나라 鄭小同이 撰한 《鄭志》에 “〈書贊〉에 ‘우리 先師인 棘下生 安國 또한 이 학문을 좋아하였고, 世祖(光武帝)가 後漢을 일으킨 뒤로 衛宏‧賈逵‧馬融 등 여러 君子의 業은 高雅한 재주와 옛것을 좋아하는 박학이 이미 베풀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張逸이 ‘〈書贊〉에서 말한 우리 先師인 棘下生은 어느 때 사람인가?’ 하고 묻자, 〈鄭康成이〉 ‘齊나라 田氏 때에 학문을 좋아하는 자들이 모인 곳으로 齊나라 사람들이 그를 棘下生이라 불렀던 것이고, 일정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답했다.”라고 하였다.
宋代 王應麟이 撰한 《困學紀聞》에 “棘下는 곧 稷下인데, 劉向의 《別錄》에 ‘談說하는 선비들이 稷門 아래에 모였다.’라고 했다.” 하였다.
‘棘子下生’의 ‘子’를 阮元은 衍文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책에 ‘棘子下生 安國’, ‘棘下生 安國’이 계속 뒤섞여 나오고 있으니,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심지어 淸代 考證學者 閻若據는 그의 《尙書古文疏證》에서 “‘我先師棘下生子安國’의 ‘子’자는 읽을 때 安國에 붙여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孔’이라 하지 않고 ‘子’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春秋》 隱公 11년 조에 있는 《公羊傳》의 ‘子沈子曰’에 대한 註에 ‘沈子’를 ‘子’라고 칭하여 氏 위에 얹어놓은 것은 그가 스승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子’를 얹어놓지 않은 것은 다른 스승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鄭康成은 스스로 安國에게 연원을 댔기 때문에 ‘子’를 安國의 위에 얹어놓은 것인데, ‘子孔子’라고 하지 않은 것은 또 孔子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子’자를 끌어내려 安國 위에 놓은 것은 억설인 듯하다.
역주21 : 여기서는 《尙書》를 가리킨다.
역주22 鄭玄書贊云……猶復疑惑未悛 : 《古文尙書怨詞》에 “賈逵‧馬融‧鄭玄 등 3인의 경우는 원래 孔學이 아니었다. 賈逵의 아버지 賈徽도 일찍이 《書》를 塗惲에게 전수받았으니 바로 古文正派였고, 그 뒤 賈逵‧馬融‧鄭玄은 모두 杜林漆書學을 전수받았으니, 비록 이름은 ‘古文’이라 하나 실은 孔壁古文과 같지 않다. 하나는 바로 漆書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壁經인 것이다. 《正義》에 鄭玄은 孔學을 극히 존중하고 伏學을 천시하였는데, 그가 〈書贊〉을 함에 있어서 孔學에 대해서는 ‘우리 先師인 棘子下生 安國’이라 하고, 伏學에 대해서는 이 가려짐을 미워하면서 疑惑을 떨쳐버리지 못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孔學’은 孔安國의 《尙書》를, ‘杜林漆書之學’은 後漢 杜林이 西州에서 얻은 《古文尙書》인 곧 《杜林漆書尙書》를, ‘伏學’은 伏生의 《尙書》를 가리킨다.
역주23 是鄭意師祖孔學……其書散逸 : 《欽定書經傳說彙纂》에는 “鄭玄이 孔學을 師承하고 夏侯‧歐陽 등을 천시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鄭注는 孔安國과 다르고 篇數는 三家와 같았는가? 그것은 진실로 孔安國이 주를 단 뒤에 그 책이 散逸되었다가 晉世에 이르러 비로소 《古文尙書》를 얻어 시행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4 (憂腎陽)[優賢揚] : 저본에는 ‘憂腎陽’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孫志祖가 말하기를 ‘憂腎陽 3字는 바로 優賢揚의 잘못이다. ‘優賢揚歷’은 그 말이 《三國志》 〈魏志 管寧傳〉과 左思의 〈魏都賦〉에 보이고, 또 《隷釋》에 실린 漢代 成陽令(管遵)의 〈唐扶頌〉에도 ‘優賢颺歷’이란 글이 있다.’ 하였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優賢揚’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5 姑子外弟梁柳(邊)……故作帝王世紀 : 《尙書注疏原目考證》에서 ‘姑子外弟梁柳邊 得古文尙書’에 대하여 臣 召南이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邊’자는 衍文이니 梁柳는 곧 皇甫謐의 고모 아들 外弟이다. 다만 文義를 자세히 살펴보면 ‘姑子’ 위에 ‘從’자가 빠진 것 같다. 말하자면 皇甫謐이 梁柳로부터 《古文尙書》를 얻어서 이에 《帝王世紀》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현행 《晉書》 〈皇甫謐傳〉에도 ‘城陽太守梁柳 謐從姑子’란 말만 있다. 이에 의거하여 ‘邊’을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26 (慕)[募] : 저본에는 ‘慕’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宋本, 閩本, 明監本에는 ‘慕’가 ‘募’로 되어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募’로 바로잡았다.

상서정의(1) 책은 2019.11.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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