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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3)

상서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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后非民이면 罔使 民非后 罔事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사람이 없고,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사람이 없으니,
[傳]君以使民自尊이요 民以事君自生이라
임금은 백성을 부리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존대하고, 백성은 임금을 섬기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간다.
無自廣以狹人하소서 匹夫匹婦 不獲自盡하면 民主罔與成厥功하리이다
자신은 대단하게 생각하고 남은 시시하게 여기지 마소서. 일반 남녀들이 스스로 〈뜻을 다해야 되는데〉 뜻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면 백성의 임금은 더불어 공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傳]上有狹人之心이면 則下無所自盡矣 言先盡其心然後 乃能盡其力하니 人君所以成功이라
위에서 남을 시시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아래에서 스스로 그 뜻을 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먼저 그 마음을 다한 연후에야 능히 그 힘을 다할 수 있으니, 임금이 이 때문에 공을 이루게 될 것이란 말이다.
[疏]‘無自’至‘厥功’
經의 [無自]에서 [厥功]까지
○正義曰:旣言君民相須, 又戒王虛心待物. 凡爲人主, 無得爲廣大, 以狹小前人, 勿自以所知爲大, 謂彼所知爲小.
○正義曰:이미 임금과 백성은 서로 의지함을 말하고 나서 또 王은 허심탄회하게 사물을 대해야 한다고 경계하였다. 무릇 임금이 되면 자신은 대단하게 생각하고 전 사람은 시시하게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자기가 아는 것은 대단하게 여기고 남이 아는 것은 시시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若謂彼狹小, 必待之輕薄, 彼知遇薄, 則意不自盡.
만일 남을 시시하다고 여기면 반드시 경박하게 대하기 십상이고, 남이 경박하게 대우한 줄을 알면 뜻(마음)을 다하지 않기 마련이다.
匹夫匹婦不得自盡其意, 則在下不肯親上, 在上不得下情, 如是則人主無與成其功也.
일반 남녀들이 스스로 그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근히 하지 않으려 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니, 이와 같다면 임금도 더불어 그 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沃丁 旣葬伊尹於亳하니
沃丁이 伊尹을 亳에 이미 장사 지내고 나니,
[傳]沃丁 太甲子 伊尹旣致仕老終하니 以三公禮葬이라
沃丁은 太甲의 아들이다. 伊尹이 이미 致仕하고 늙어서 세상을 마치니, 三公의 禮로써 장례를 치렀다.
咎單 遂訓伊尹事하다
咎單이 드디어 伊尹의 일을 訓暢(드러냄)하였다.
[傳]訓暢其所行功德之事
그가 행한 功德의 일을 훈창하였다.
하다
〈沃丁〉을 지었다.
[傳]咎單 忠臣名이라 作此篇以戒也러니이라
咎單은 忠臣 이름이다. 이 篇을 지어 경계하였는데, 망실되었다.
[疏]‘沃丁’至‘作沃丁’
書序의 [沃丁]에서 [作沃丁]까지
○正義曰:沃丁, 殷王名也. ‘沃丁旣葬伊尹’, 言重其賢德, 備禮而葬之.
○正義曰:沃丁은 殷나라 王의 이름이다. ‘沃丁旣葬伊尹’은 그 賢德을 소중하게 여기어 禮를 갖추어서 장례를 치렀음을 말한 것이다.
咎單以沃丁愛慕伊尹, 遂訓暢伊尹之事以告沃丁, 史錄其事, 作沃丁之篇.
咎單은 沃丁이 伊尹을 愛慕하기 때문에 드디어 伊尹의 일을 훈창하여 沃丁에게 고하였는데, 史官이 그 일을 기록하여 〈沃丁〉편을 지었다.
[疏]○傳‘沃丁’至‘禮葬’
○傳의 [沃丁]에서 [禮葬]까지
○正義曰:世本‧本紀 皆云 “太甲崩, 子沃丁立.” 是爲太甲子也.
○正義曰:≪世本≫과 ≪史記≫ 〈殷本紀〉에 모두 “太甲이 승하하고 아들 沃丁이 즉위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가 바로 太甲의 아들이다.
伊尹本是三公, 上篇言其告歸, 知‘致仕老終, 以三公禮葬.’
伊尹은 본시 三公이었고, 上篇에서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致仕하고 늙어서 세상을 마치니, 三公의 禮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것을 〈孔安國이〉 알았다.
皇甫謐云 “沃丁八年, 伊尹卒, 卒年百有餘歲. 大霧三日. 沃丁葬之以天子禮, 葬祀以太牢, 親臨喪, 以報大德.”
皇甫謐은 “沃丁 8년에 伊尹이 卒하였으니, 卒한 해의 나이가 100여 세였다. 짙은 안개가 3일이나 끼었다. 沃丁이 天子의 禮로써 장례를 치르고 장사 때에는 太牢를 가지고 제사를 지냈으며 친히 喪에 임하여 큰 德에 보답했다.”라고 하였다.
晉文請, 襄王不許, 沃丁不當以天子之禮葬伊尹也. 孔言三公禮葬, 未必有文, 要情事當然也.
晉나라 文公이 〈天子만이 할 수 있는〉 隧道(墓道)를 만들 것을 청하자, 襄王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沃丁은 마땅히 天子의 禮로써 伊尹을 장사 지내서는 안 된다. 孔安國이 ‘三公의 禮로써 장례를 치렀다.’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증빙할 문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컨대 情實이 당연히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伊陟 相大戊하니
伊陟이 太戊를 도우니,
[傳]伊陟 伊尹子 太戊 沃丁弟之子
伊陟은 伊尹의 아들이고, 太戊는 沃丁의 조카이다.
○太戊 太甲子라하니라
○太戊는 馬融이 “太甲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亳有祥하여 桑穀共生於朝어늘
亳에 妖怪스런 일이 있어 뽕나무와 닥나무가 하나로 합쳐져 조정에 났거늘,
[傳]祥 妖怪 二木合生하여 七日大拱하니 이라
祥은 妖怪스런 것이다. 두 나무가 하나로 합쳐져 나서 7일 만에 굵기가 두 손으로 감싸 잡을 만큼 자랐으니, 불공함에 대한 징벌을 예시한 것이다.
○穀 楮也
○穀은 닥나무이다.
伊陟 贊於巫咸하여 作咸乂四篇이라
伊陟이 巫咸에게 고하여 〈咸乂〉 4편을 지었다.
[傳]贊 告也 巫咸 臣名이라 皆亡이라
贊은 告의 뜻이다. 巫咸은 신하의 이름이다. 〈4편은〉 다 망실되었다.
○巫咸 馬云 巫 男巫也이니 殷之巫也라하니라
○巫咸에 대하여 馬融은 “巫는 남자 무당이다. 이름은 ‘咸’이니, 殷나라의 무당이다.”라고 하였다.
[疏]‘伊陟’至‘四篇’
書序의 [伊陟]에서 [四篇]까지
○正義曰:伊陟輔相太戊, 於亳都之內, 有不善之祥, 桑穀二木, 共生於朝. 朝非生木之處, 是爲不善之徵.
○正義曰:伊陟이 太戊를 보필하였는데, 亳都의 안에 좋지 못한 妖怪가 있어 뽕나무와 닥나무가 하나로 합쳐져 조정에 났다. 조정은 나무가 나는 곳이 아니니, 이는 좋지 못한 징조이다.
伊陟以此桑穀之事, 告於巫咸, 錄其事, 作咸乂四篇. 乂訓治也. 言所以致妖, 須治理之, 故名篇爲咸乂也.
伊陟이 이와 같은 뽕나무와 닥나무의 일을 가지고 巫咸에게 고하였고, 史官이 그 일을 기록하여 〈咸乂〉 4편을 지었다. 乂는 治의 뜻으로 풀이한다. 요괴스런 것을 다스려야 함을 말했기 때문에 편명을 〈咸乂〉라 한 것이다.
伊陟不先告太戊而告巫咸者, 君奭云 “在太戊, 時則有若巫咸乂王家.”
伊陟이 먼저 太戊에게 고하지 않고 巫咸에게 고한 것은 〈君奭〉에 “太戊 때에는 巫咸 같은 이가 있어 王家(王室)를 보필하여 국가가 잘 다스려지게 했다.”라고 하였으니,
則咸是賢臣, 能治王事, 大臣見怪而懼, 先共議論, 而後以告君.
咸이 바로 賢臣으로서 王事를 잘 다스리자, 大臣이 요괴스러운 일을 보고 두려워하여 먼저 함께 의논하고 나서 임금에게 고한 것이다.
下篇序云 “太戊贊於伊陟.” 明先告於巫咸, 而後告太戊.
下篇의 書序에서 “太戊가 伊陟에게 고했다.”라고 하였으니, 먼저 巫咸에게 고하고 뒤에 太戊에게 고한 것이 분명하다.
[疏]○傳‘伊陟’至‘之子’
○傳의 [伊陟]에서 [之子]까지
○正義曰:‘伊陟, 伊尹子’, 相傳爲然. 殷本紀云 “沃丁崩, 弟太庚立.
○正義曰:伊陟이 伊尹의 아들이란 것은 서로 그렇게 전하였다. ≪史記≫ 〈殷本紀〉에 “沃丁이 승하하자 아우 太庚이 즉위하였고,
崩, 子小甲立. 崩, 弟雍己立. 崩, 弟太戊立.” 是太戊爲小甲弟, 太庚之子.
太庚이 승하하자 아들 小甲이 즉위하였고, 小甲이 승하하자 아우 雍己가 즉위하였고, 雍己가 승하하자 아우 太戊가 즉위했다.”라고 하였으니, 이 太戊는 小甲의 아우이자 太庚의 아들이다.
[疏]○傳‘祥妖’至‘之罰’
○傳의 [祥妖]에서 [之罰]까지
○正義曰:漢書五行志云 “凡草物之類謂之妖, 自外來謂之祥.” 祥是惡事先見之徵, 故爲‘妖怪’也.
○正義曰:≪漢書≫ 〈五行志〉에 “모든 草物 따위를 ‘妖’라 이르니, 〈妖는 夭胎와 같은 것이고,〉 밖으로부터 오는 것을 ‘祥’이라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祥은 나쁜 일이 있을 것을 먼저 보이는 징조이기 때문에 ‘妖怪’라고 한 것이다.
‘二木合生’, 謂共處生也.
[二木合生] 같은 곳에서 나는 것을 이른다.
‘七日大拱’, 伏生書傳有其文, 或當別出餘書, 則孔用之也.
[七日大拱] 伏生의 ≪書傳≫에 그와 같은 글이 있거니와, 혹시 별도로 다른 책에서 나왔다면 孔安國이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다.
鄭玄注書傳云 “兩手搤之曰.” 生七日而見其大滿兩手也.
鄭玄이 ≪書傳≫에 주를 달기를 “두 손으로 감싸 잡는 것을 ‘拱’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나무가 난 지 7일 만에 굵기가 두 손으로 감싸 잡을 만큼 자랐음을 보인 것이다.
殷本紀云 ‘一暮大拱’, 言一夜卽滿拱, 所聞不同, 故說異也.
≪史記≫ 〈殷本紀〉에 ‘一暮大拱’이라고 한 것은 하룻밤 사이에 한 아름에 꽉 찬 것을 말하니, 들은 바가 같지 않기 때문에 말이 이처럼 다르다.
五行傳曰 “貌之不恭, 是謂不肅, 時則有靑眚祥.”
≪五行傳≫에 “용모가 공손치 못함을 ‘不肅’이라 이르니, 이럴 때에는 靑眚과 靑祥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漢書五行志 “夏侯始昌‧劉向說云 ‘肅, 敬也. 內曰恭, 外曰敬. 人君行己, 體貌不恭, 怠慢驕蹇, 則不能敬.
≪漢書≫ 〈五行志〉에 “夏侯始昌과 劉向 등이 ‘肅은 敬의 뜻이다. 내적인 것을 「恭」, 외적인 것을 「敬」이라 한다. 임금이 행동함에 있어서 體貌가 공손하지 못하여 怠慢하고 驕蹇하면 능히 공경하지 못한다.
木色靑, 故有靑眚(之)[靑]祥.” 是言木之變怪, 是貌不恭之罰. 人君貌不恭, 天將罰之, 木怪見其徵也.
나무 색깔이 푸르기 때문에 靑眚과 靑祥이 있게 된다.’고 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나무의 변괴를 말한 것인데 바로 不恭에 대한 벌칙이다. 임금이 용모가 불공하면 하늘이 벌을 내리는데 나무의 요괴스러움이 그 징조를 보인 것이다.
皇甫謐云 “太戊問於伊陟, 伊陟曰 ‘臣聞妖不勝德, 帝之政事有闕.’ 白帝修德.
皇甫謐이 “太戊가 伊陟에게 물으니, 伊陟이 ‘신은 듣건대 妖가 德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임금님의 정사에 결점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임금에게 德을 닦도록 사뢰었다.
太戊退而占之, 曰 ‘桑穀野木而不合生於朝, 意者朝亡乎.’
太戊가 물러가서 점을 쳐보았더니, 점친 자가 ‘뽕나무와 닥나무는 들에서 나는 나무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니, 아마 조정이 망할 것인가!’라고 하자,
太戊懼, 修先王之政, 明養老之禮, 三年而遠方重譯而至七十六國.” 是言妖不勝德也.
太戊가 두려워하여 先王의 정사를 닦고 養老의 禮를 밝혔더니, 3년 만에 먼 지방에서 이중 통역을 거쳐서 온 나라가 76국이나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妖가 德을 이기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疏]○傳‘贊告’至‘臣名’
○傳의 [贊告]에서 [臣名]까지
○正義曰:禮有贊者, 皆以言告人, 故贊爲告也. 君奭傳曰 “巫, 氏也.” 當以巫爲氏, 名咸.
○正義曰:禮에 있는 ‘贊’은 모두 말로써 사람에게 고하였기 때문에 贊을 告로 여긴 것이다. 〈君奭〉의 傳에 “巫는 姓氏이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巫’는 姓氏이고, 이름은 ‘咸’으로 해야 한다.
此言‘臣名’者, 言是臣之名號也. 鄭玄云 ‘巫咸謂之巫官’者, 案君奭咸子又稱賢,
여기서 말한 ‘신하의 이름이다.’라는 것은 이 신하의 名號를 말한 것이다. 鄭玄이 말한 ‘巫咸은 巫官을 이른다’는 것은 〈君奭〉에서 咸의 아들을 또 賢이라 칭하였고,
父子竝爲大臣, 必不世作巫官, 故孔言‘巫, 氏’ 是也.
父子가 아울러 大臣이 된 점을 살펴보면 반드시 대대로 巫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孔安國이 말한 ‘巫는 姓氏이다.’라는 것이 옳다.
太戊贊於伊陟하니
太戊가 伊陟에게 고하니,
[傳]告以改過自新이라
과오를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될 것을 고하였다.
作伊陟原命이라
〈史官이 그 일을 기록하여〉 〈伊陟〉과 〈原命〉을 지었다.
[傳]原 臣名이라 原命‧伊陟 篇皆亡이라
原은 신하의 이름이다. 〈原命〉과 〈伊陟〉 두 편이 다 망실되었다.
[疏]‘太戊’至‘原命’
書序의 [太戊]에서 [原命]까지
○正義曰:言太戊贊於伊陟, 惟告伊陟, 不告原也.
○正義曰:“太戊가 伊陟에게 고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직 伊陟에게만 고하고 原에게는 고하지 않은 것이다.
史錄其事, 而作伊陟‧原命二篇, 則太戊告伊陟, 亦告原, 俱以桑穀事告, 故序總以爲文也.
그러나 史官이 그 일을 기록하여 〈伊陟〉과 〈原命〉 두 편을 지었으니, 太戊가 伊陟에게도 고하고 또 原에게도 고하였는데, 모두 뽕나무와 닥나무의 일을 가지고 고했기 때문에 書序에서 총괄해서 글을 지은 것이다.
原是臣名而云‘原命’, 謂以言命原, 故以‘原命’名篇, 猶如冏命‧畢命也.
原은 바로 신하의 이름인데 ‘原命’이라 한 것은 말로써 原에게 명했기 때문에 ‘原命’으로 편명을 삼은 것이니, 마치 〈冏命〉‧〈畢命〉과 같다.
仲丁 遷于하니
仲丁이 囂로 도읍을 옮기니,
[傳]太戊子 去亳이라 地名이라
仲丁은 太戊의 아들이니, 亳을 버리고 떠났다. 囂는 땅 이름이다.
[疏]‘仲丁遷于囂’
書序의 [仲丁遷于囂]
○正義曰:此三篇皆是遷都之事, 俱以君名名篇, 竝陳遷都之義, 如盤庚之誥民也.
○正義曰:이 세 편은 모두 遷都한 일을 다룬 것인데, 다 임금의 이름으로 편명을 하고 아울러 遷都한 내용을 진술하기를 마치 盤庚이 백성들에게 고한 것처럼 하였다.
發其舊都謂之‘遷’, 到彼新邑謂之‘居’, ‘遷于囂’與‘居相’亦事同也. 以‘河亶甲’ 三字句長, 不言‘于’, 其實亦是居于相也.
그 舊都를 벗어난 것을 ‘遷’이라 이르고, 저 新邑에 이른 것을 ‘居’라 하니, ‘遷于囂’와 ‘居相(相 땅에 거주함)’은 또한 일이 같은 것이다. ‘河亶甲’ 세 글자 句가 길기 때문에 ‘于’를 말하지 않았지만, 기실은 역시 ‘居于相’(相 땅에 거주함)인 것이다.
‘圮于耿’者, 孔意以爲毁于相地, 乃遷于耿地. 其篇蓋言毁意, 故序特言‘圮’也.
‘圮于耿’을 孔安國은 相 땅이 무너져서 耿 땅으로 옮겨온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篇은 아마 무너진 내용을 말했기 때문에 書序에서 특별히 ‘圮’를 말했을 것이다.
李顒云 “囂在陳留浚儀縣.” 皇甫謐云 “仲丁自亳徙囂, 在河北也. 或曰今河南敖倉.” 二說未知孰是也.
李顒은 “囂는 陳留郡 浚儀縣에 있었다.”라고 하였고, 皇甫謐은 “仲丁이 亳에서 囂로 옮겼으니, 河北에 있었다. 혹자는 ‘지금의 河南 敖倉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두 說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相地, 孔云 “在河北.” 蓋有文而知也. 謐又以耿在河東, 皮氏縣耿鄕是也.
‘相地’에 대하여 孔安國은 “河北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아마 문헌이 있어서 알았을 것이다. 皇甫謐은 또 耿이 河東에 있는 것으로 여겼으니, 皮氏縣 耿鄕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였다.
[疏]○傳‘太戊’至‘地名’
○傳의 [太戊]에서 [地名]까지
○正義曰:此及下傳言仲丁是太戊之子, 河亶甲仲丁弟也. 祖乙河亶甲子, 皆世本文也.
○正義曰:여기와 下傳에서 “仲丁은 바로 太戊의 아들이고, 河亶甲은 仲丁의 아우이며, 祖乙은 河亶甲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世本≫의 글이다.
仲丁是太戊之子, 太戊之時, 仍云亳有祥, 知仲丁遷於囂去亳也.
仲丁은 바로 太戊의 아들인데, 太戊 때에 이어서 “亳에 요괴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므로 仲丁이 囂로 옮겨가고 亳을 버렸음을 알았던 것이다.
作仲丁이라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仲丁〉을 지었다,
[傳]陳遷都之義러니이라
遷都하는 내용을 진술하였는데, 망실되었다.
河亶甲 居相이라
河亶甲이 相에 거주하였다.
[傳]仲丁弟 地名이니 在河北이라
河亶甲은 仲丁의 아우이다. 相은 땅 이름이니 河北에 있었다.
○亶 在河北이니 今魏郡有相縣이라
○亶은 河北에 있었으니 지금 魏郡에 相縣이 있다.
作河亶甲하다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河亶甲〉을 지었다.
[傳]亡이라
망실되었다.
祖乙圮于耿하니
祖乙이 相 땅이 무너져서 도읍을 耿 땅으로 옮기었으니,
[傳]亶甲子 圮於相하여 遷於耿이라 河水所毁曰圮
祖乙은 河亶甲의 아들이다. 相 땅이 무너져서 耿 땅으로 옮겨온 것이다. 河水가 무너뜨린 것을 ‘圮’라 한다.
○圮 馬云 毁也라하니라
○‘圮’는 馬融이 “毁(무너짐)이다.”라고 하였다.
[疏]傳‘亶甲’至‘曰圮’
傳의 [亶甲]에서 [曰圮]까지
○正義曰:孔以河亶甲居相, 祖乙卽亶甲之子, 故以爲圮於相地, 乃遷都于耿. 釋詁云 “圮, 毁也”. 故云 “河水所毁曰圮.”
○正義曰:孔安國은 河亶甲이 相 땅에 거주하였고, 祖乙은 곧 河亶甲의 아들이기 때문에 相 땅이 무너져서 耿 땅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爾雅≫ 〈釋詁〉에 “圮는 毁(무너짐)의 뜻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河水가 무너뜨린 것을 ‘圮’라 한다.”라고 하였다.
據文‘圮于耿’也, 知非圮毁于耿, 更遷餘處, 必云‘圮於相地, 遷於耿’者, 明與其上文連.
書序의 ‘圮于耿’에 의거하여 耿 땅이 무너져서 여타의 곳으로 옮겨간 것이 아님을 〈孔安國이〉 알았기에 굳이 ‘相 땅이 무너져서 耿 땅으로 옮겨온 것이다.’라고 한 것은 분명 그 윗글과 연계시킨 것이다.
上云‘遷于囂’, 謂遷來向囂, ‘居于相’, 謂居於相地, 故知‘圮于耿’, 謂遷來于耿. 以文相類, 故孔爲此解.
위에서 말한 ‘遷于囂’는 옮겨와 囂로 향해 감을 이르는 것이고, ‘居于相’은 相 땅에 거주함을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圮于耿’은 耿 땅으로 옮겨온 것을 이른 것임을 〈孔安國이〉 알았다. 문형이 서로 같기 때문에 孔安國이 이렇게 풀이한 것이다.
謂古人之言, 雖尙要約, 皆使言足其文, 令人曉解, 若圮於相, 遷居於耿, 經言‘圮于耿’, 大不辭乎.
이는 옛사람의 말은 비록 요약함을 숭상하였으나 모두 말이 그 글을 보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相 땅이 무너져서 耿 땅으로 옮겨와 거주했다.’고 한다면 書序에서 ‘圮于耿’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말이 안 되는 것인가.
且亶甲居於相, 祖乙居耿, 今爲水所毁, 更遷他處, 故言毁于耿耳, 非旣毁乃遷耿也.
또 河亶甲은 相 땅에 거주하였고, 祖乙은 耿 땅에 거주다가 지금 물에 무너져서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耿 땅이 무너졌다.’고만 말했을 뿐이지, 〈相 땅이〉 이미 무너져서 耿 땅으로 옮겨온 것은 아니다.
盤庚云 “不常厥邑, 于今.” 及其數之, 惟有亳‧囂‧相‧耿四處而已,
〈盤庚〉에서 “일정한 도읍을 갖지 못하고 옮긴 곳이 지금까지 다섯 군데나 된다.”라고 하였는데, 정작 세어보면 오직 亳‧囂‧相‧耿 네 곳만 있을 뿐이니,
知此旣毁於耿, 更遷一處, 盤庚又自彼處而遷於殷耳. 殷本紀云 “祖乙遷於邢.” 馬遷所爲說耳.
이것으로 이미 耿 땅이 무너져서 다시 어떤 한 곳으로 옮겨갔고, 盤庚은 또 저 어떤 곳으로부터 殷 땅으로 옮겨온 것임을 알 수 있다. ≪史記≫ 〈殷本紀〉에 “祖乙이 邢 땅으로 옮기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司馬遷이 한 말일 뿐이다.
鄭玄云 “祖乙又去相居耿, 而國爲水所毁, 於是修德以禦之, 不復徙也. 錄此篇者, 善其國圮毁, 改政而不徙.”
鄭玄은 “祖乙이 또 相 땅을 버리고 耿 땅에 거주하다가 國都가 물에 무너졌지만, 이에 德을 닦아 〈큰 재난을〉 방어하고 다시 옮겨가지 않았다. 이 篇을 기록한 사관은 국도가 무너지자 정사를 잘하는 쪽으로 고쳐나가고 옮겨가지 않은 점을 좋게 평가하였다.”라고 하였다.
如鄭所言, 稍爲文便, 但上有仲丁‧亶甲, 下有盤庚, 皆爲遷事, 作書述其遷意.
鄭玄의 말대로 하면 문장은 조금 순하다. 다만 위에는 〈仲丁〉과 〈河亶甲〉이 있고 아래에는 〈盤庚〉이 있는데 모두 옮기는 일을 다루었기 때문에 글을 지어 옮기는 일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此若毁而不遷, 序當改文見義, 不應文類遷居, 更以不遷爲義.
이것이 만일 무너졌는데도 옮기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書序에서는 마땅히 글을 고쳐서 뜻을 보여야 하니, 응당 거주한 것처럼 글을 쓰지 않고, 다시 옮기지 않은 것으로 내용을 구성하였을 것이다.
汲冢古文云 ‘盤庚自奄遷於殷’者, 蓋祖乙圮于耿, 遷于奄, 盤庚自奄遷于殷, 亳‧囂‧相‧耿與此奄五邦者. 此蓋不經之書, 未可依信也.
≪汲冢古文≫에 ‘盤庚이 奄 땅으로부터 殷 땅으로 옮기었다.’라고 한 것은 대개 祖乙이 耿 땅이 무너져서 奄 땅으로 옮기고, 盤庚은 奄 땅으로부터 殷 땅으로 옮기어서, 亳‧囂‧相‧耿이 이 奄과 함께 5邦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법도에 맞지 않는 글이라 의거하여 믿을 수가 없다.
作祖乙이라
〈祖乙〉을 지었다.
[傳]亡이라
망실되었다.
역주
역주1 [自] : 저본에는 ‘自’자가 없으나, “毛本에는 ‘得’ 아래에 ‘自’자가 있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 沃丁 : 孔傳에서는 咎單이 지은 것으로, 孔疏에서는 史官이 지은 것으로 보았다.
역주3 (遂)[隧] : 저본에는 ‘遂’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는 ‘遂’가 ‘隧’로 되어 있으니, 살펴보건대 ‘隧’자가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4 [云] : 저본에는 ‘云’자가 없으나, ≪經典釋文≫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5 不恭之罰 : 임금의 모습이 불공하면 하늘이 장차 벌을 내리는데, 妖怪스런 나무가 미리 그 징후를 보인 것이다.
역주6 (使)[史] : 저본에는 ‘使’로 되어 있으나, “各本에 ‘使’가 ‘史’로 되어 있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史’로 바로잡았다.
역주7 (揚)[拱] : 저본에는 ‘揚’으로 되어 있으나, “閩本‧監本‧毛本에 ‘揚’이 ‘拱’으로 되어 있으니, 살펴보건대 ‘拱’자가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拱’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之)[靑] : 저본에는 ‘之’로 되어 있으나, ≪漢書≫ 〈五行志〉와 山井鼎(日)의 ≪七經孟子考文≫에 “宋板에 ‘之’가 ‘靑’으로 되어 있으니, ≪漢書≫ 〈五行志〉에 기록된 것이 宋板과 같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靑’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9 (筭)[等] : 저본에는 ‘筭’으로 되어 있으나, “宋板에는 筭이 等으로 되어 있는데, 살펴보건대 筭자는 等자와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等을 筭으로 잘못 쓴 것이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古本‧岳本‧宋板‧≪纂傳≫에는 ‘三’이 ‘二’로 되어 있으니, 살펴보건대 ‘二’자가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11 : ≪史記≫에는 ‘隞’로 되어 있다.
역주12 五邦 : 尙나라 초기에 도읍한 다섯 지역으로, 孔安國은 亳(湯)‧囂(仲丁)‧相(河亶甲)‧耿(祖乙)‧亳(盤庚), 馬融은 商丘‧亳‧囂‧相‧耿으로 보았다.

상서정의(3)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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