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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2)

상서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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壺口하시다
[傳]壺口在冀州하고 梁岐 在雍州하니 從東循山治水而西
○馬云 壺口 山名이라 如字
[疏]傳‘壺口’至‘而西’
○正義曰:史記稱高祖入咸陽, 蕭何先收圖籍, 則秦焚詩書, 圖籍皆在.
孔君去漢初七八十年耳, 身爲武帝博士, 必當具見圖籍, 其山川所在, 必是驗實而知‘壺口在冀州, 梁‧岐在雍州’. 當時疆界爲然也.
此於冀州之分, 言及雍州之山者, 從東循山治水而西故也. 鄭云 “於此言‘治梁及岐’者, 蓋治水從下起, 以襄水害易也.”
班固作漢書地理志, 據前漢郡縣, 言山川所在. 志云 “壺口在河東北屈縣東南.” 應劭云 “已有南屈, 故稱北屈.”
梁山在左馮翊夏陽縣西北, 岐山在右扶風美陽縣西北, 然則壺口西至梁山, 梁山西至岐山, 從東而向西言之也.
經於壺口之下言治者, 孔意蓋云欲見上下皆治也.


壺口山에서 일을 시작해서 梁山을 다스려 岐山으로 미쳐가셨다.
壺口山은 冀州에 있고, 梁山과 岐山은 雍州에 있으니, 동쪽에서부터 산을 따라 홍수를 다스려 서쪽으로 간 것이다.
○馬融은 “壺口는 산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治는 본음대로 읽는다.
傳의 [壺口]에서 [而西]까지
○正義曰:≪史記≫에서 “高祖가 咸陽에 들어갔을 때 蕭何가 圖籍(지도와 호적)을 먼저 거두었다.”라고 칭하였으니, 秦나라가 詩書를 불태웠지만, 圖籍은 모두 건재하였다.
孔君(孔安國)은 漢나라 초와의 거리가 7,8십 년밖에 안 되고, 신분이 武帝 때 博士였으니, 반드시 圖籍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山川의 소재를 반드시 조사하여 ‘壺口山은 冀州에 있고, 梁山과 岐山은 雍州에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니, 당시에 疆界가 그랬을 것이다.
여기 冀州를 구분한 곳에서 雍州의 산을 언급한 것은 동쪽에서부터 산을 따라 홍수를 다스려 서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鄭玄은 “여기에서 ‘梁山을 다스려 岐山으로 미쳐갔다.’고 한 것은 아마 홍수를 다스리는 일은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수해를 제거하기 쉽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班固가 ≪漢書≫ 〈地理志〉를 지을 때에 前漢의 郡縣에 의거하여 山川의 소재를 말하였는데, 〈地理志〉에 “壺口山은 河東 北屈縣 동남쪽에 있다.”라 하였고, 應劭는 “이미 南屈이 있기 때문에 北屈이라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梁山은 左馮翊 夏陽縣 서북쪽에 있고, 岐山은 右扶風 美陽縣 서북쪽에 있으니, 그렇다면 壺口山은 서쪽으로 梁山에 이르고 梁山은 서쪽으로 岐山에 이르기 때문에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향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經文에서 ‘壺口’의 아래에 ‘治’를 말한 것은 孔安國의 생각에 아마 위아래가 다 다스려짐을 보이려고 한 것으로 여긴 듯하다.


역주
역주1 治梁及岐 : 蔡傳에서는 及을 與(및)의 뜻으로 보아 ‘梁山과 岐山을 다스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상서정의(2)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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