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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2)

상서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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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정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織皮 崐崘 析支 인데 西戎 로다
[傳]織皮 毛布 有此四國하여 在荒服之外流沙之內 羌髳之屬 皆就次敍 美禹之功及戎狄也
○馬云 崐崘在臨羌西 馬云 析支在河關西 漢書志 朔方郡有渠搜縣 武紀云 是也 西戎國名이라
[疏]傳‘織皮’至‘戎狄也’
○正義曰:四國皆衣皮毛, 故以‘織皮’冠之. 傳言‘織皮, 毛布. 有此四國’, 崐崘也‧析支也‧渠也‧搜也, 四國皆是戎狄也.
末以‘西戎’總之. 此戎在荒服之外, 流沙之內. 牧誓云 “武王伐紂, 有羌‧髳從之.” 此是羌‧髳之屬, 禹皆就次敍.
美禹之功遠及戎狄, 故記之也. 鄭玄云 “衣皮之民, 居此崐崘‧析支‧渠搜三山之野者, 皆西戎也.”
王肅云 “崐崘在臨羌西, 析支在河關西. 西戎, 西域也.” 王肅不言‘渠搜’, 鄭倂‘渠搜’爲一, 孔傳不明.
或亦以‘渠搜’爲一, 通‘西戎’爲四也. 鄭以‘崐崘’爲山, 謂別有崐崘之山, 非河所出者也. 所以孔意或是地名國號, 不必爲山也.


織皮를 바친 나라는 崐崘과 析支와 渠와 搜인데 이들 西戎이 〈안정되어〉 질서정연해졌다.
織皮는 毛布이다. 이들 네 나라가 있어 荒服의 밖, 流沙의 안에 있었다. “羌‧髳의 등속이 모두 〈안정되어〉 질서정연해졌다고 한 것은 禹의 공적이 戎狄에까지 미쳐갔음을 찬미한 것이다.
○馬融은 “崐崘山은 臨羌의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馬融은 “析支는 河關의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漢書≫ 〈地理志〉에 “朔方郡에 渠搜縣이 있다.”라고 한 것과 〈武帝紀〉에 “북쪽으로는 渠搜를 징발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髳는 西戎의 나라 이름이다.
傳의 [織皮]에서 [戎狄也]까지
○正義曰:네 나라가 모두 皮毛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에 ‘織皮’를 文頭에 올려놓은 것이다. 孔傳에서 ‘織皮는 毛布이다. 이들 네 나라가 있어’라고 하였으니, 崐崘‧析支‧渠‧搜로서 네 나라는 모두 戎狄이다.
그러므로 끝에 ‘西戎’을 가지고 총괄한 것이다. 이 戎狄은 荒服의 밖, 流沙의 안에 있다. 〈牧誓〉에 “武王이 紂를 정벌할 때에 羌과 髳가 종군하였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羌과 髳의 등속으로 禹가 모두 〈안정시켜〉 질서정연하게 하였다.
禹의 공적이 멀리 戎狄에까지 미쳐갔음을 찬미하기 위하여 이 일을 기록한 것이다. 鄭玄은 “皮服을 입은 민족으로서 이 崐崘山과 析支山과 渠搜山 세 산의 들판에 자리 잡고 사는 자들은 모두 西戎이다.”라고 하였다.
王肅은 “崐崘은 臨羌의 서쪽에 위치해 있고, 析支는 河關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西戎은 西域이다.”라고 하였다. 王肅은 ‘渠搜’를 말하지 않았고, 鄭玄은 ‘渠’와 ‘搜’를 아울러서 하나로 여겼는데, 孔傳에서는 그 점을 밝히지 않았다.
혹은 또한 ‘渠’와 ‘搜’를 하나로 여기고 ‘西戎’까지 통틀어서 넷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鄭玄이 崐崘을 산으로 여긴 것은 별도로 崐崘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황하가 나오는 곤륜산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안국의 생각에는 아마도 地名이나 國號로 여긴 듯하니 꼭 산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역주
역주1 渠 搜 : 蔡傳에서는 ‘渠搜’를 합하여 나라 이름으로 보았다.
역주2 卽敍 : 蔡傳에서는 ‘크게 공을 이룬 것’으로 풀이하였다.
역주3 北發渠搜 : ≪漢書≫ 〈武帝紀〉의 ‘北發渠搜’에 대한 臣瓚의 注에서 인용한 ≪孔子三朝記≫의 “北發渠搜 南撫交趾(북쪽으로 渠搜를 징발하고 남쪽으로 交趾를 어루만졌다.)”에 의거하면 渠搜만 국명이고, ≪大戴禮記≫ 〈小閒〉의 “肅愼北發渠搜氐羌來服(숙신‧북발‧거수‧저강이 와서 복종하였다.)”에 의거하면, 北發과 渠搜를 두 국명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臣瓚의 注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상서정의(2)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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