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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2)

상서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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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碣石 海畔山이라 禹夾行此山之右하여 而入河逆上이라
此州 帝都 不說境界 以餘州所至 則可知
先賦後田 亦殊於餘州 不言貢篚 亦差於餘州
[疏]傳‘碣石’至‘餘州’
○正義曰:地理志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是碣石爲海畔山也.
鄭云 “戰國策碣石在九門縣, 今屬常山郡, 蓋別有碣石, 與此名同.” 今驗九門無此山也.”
下文‘導河入于海’, 傳云 “入于渤海.” 渤海之郡, 當以此海爲名.
計渤海北距碣石五百餘里, 河入海處, 遠在碣石之南, 禹行碣石, 不得入于河也.
蓋遠行通水之處, 北盡冀州之境, 然後南迴入河而逆上也.
‘夾右’者, 孔云 “夾行此山之右.” 則行碣石山西, 南行入河, 在碣石之右, 故云 ‘夾右’也.
顧氏亦云 “山西曰右.” 鄭玄云 “禹由碣石山西北行, 盡冀州之境, 還從山東南行入河.”
鄭以北行則東爲右, 南行西爲右, 故夾山兩旁, 山常居右, 與孔異也.
‘梁州’傳云 “浮東渡河而還帝都, 白所治也.” 則入河逆上, 爲還都白所治也.
禹之治水, 必每州巡行, 度其形勢, 計其人功, 施設規模, 指授方略, 令人分布竝作, 還都白帝所治.
於時帝都近河, 故於每州之下, 皆言浮水達河, 記禹還都之道也. 冀‧兗‧徐‧荊‧豫‧梁‧雍州, 各自言河, 惟靑‧揚二州, 不言河耳.
兗州云 “浮于濟‧漯, 達于河.” 故靑州直云 “達于濟.” 徐州云 “浮于淮‧泗, 達于河.” 故揚州云 “達于淮‧泗.” 皆記禹入河之道也.
王肅云 “凡每州之下, 說諸治水者, 禹功主於治水, 故詳記其所治之州, 往還所乘涉之水名.”
肅雖不言還都白帝, 亦謂爲治水, 故浮水也. 鄭玄以爲 “治水旣畢, 更復行之, 觀地肥瘠, 定貢賦上下.” 其意與孔異也.
八州皆言境界, 而此獨無, 故解之‘此州帝都, 不說境界, 以餘州所至則可知’也.
兗州云 ‘濟‧河’, 自東河以東也. 豫州云 ‘荊‧河’, 自南河以南也.
雍州云 ‘西河’, 自西河以西也. 明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是冀州之境也.
馬‧鄭皆云 “冀州不書其界者, 時帝都之, 使若廣大然.” 文旣局以州名, 復何以見其廣大, 是妄說也.
[疏]又解餘州先田後賦, 此州先賦後田, 亦如境界, 殊於餘州也.
言‘殊’者, 當爲田賦以收穫爲差, 田以肥瘠爲等.
若田在賦上, 則賦宜從田, 田美則宜賦重, 無以見人功修否, 故令賦先於田, 以見賦由人功.
此州旣見此理, 餘州從而可知, 皆令賦在田下, 欲見賦從田出, 爲此故, 殊於餘州也.
鄭玄云 “此州入穀不貢.” 下云 “五百里甸服.” 傳云 “爲天子服治田.” 是田入穀, 故不獻貢篚, 差異於餘州也.
甸服止方千里, 冀之北土, 境界甚遙, 遠都之國, 必有貢篚, 擧大略而言也.


오른쪽으로 碣石을 끼고 黃河로 들어가셨다.
碣石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다. 禹가 이 산의 오른쪽을 끼고 가다가 황하에 들어가서는 거슬러 올라갔다.
이 州(冀州)는 帝都인지라 境界를 말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州에 이르는 곳을 가지고 보면 〈그 경계를〉 알 수 있다.
賦를 먼저 적고 田을 뒤에 적은 것이 또한 나머지 州들과 다른 점이다. 貢篚를 말하지 않은 것도 나머지 州들과 다른 점이다.
傳의 [碣石]에서 [餘州]까지
○正義曰:≪漢書≫ 〈地理志〉에는 碣石山이 北平 驪城縣 서남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碣石山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다.
鄭玄은 “≪戰國策≫에는 碣石山이 九門縣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常山郡에 속해 있으니, 아마 별도로 碣石山이 있어 이와 이름이 같았던 모양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징험해보면 九門縣에는 이런 산이 없다.
下文에 ‘황하를 인도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孔傳에서 “渤海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渤海郡은 응당 이 바다를 가지고 이름했을 것이다.
계산해보면 渤海郡은 북쪽으로 碣石山과의 거리가 500여 리이므로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멀리 碣石山의 남쪽에 있었을 것이니, 禹가 碣石山에 갔다면 황하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멀리 가서 홍수를 통하게 한 곳은 북쪽으로 冀州의 지경을 다하고 난 다음에야 남쪽으로 돌아서 황하로 들어가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다.
[夾右] 孔安國은 “이 산의 오른쪽을 끼고 갔다.”라고 하였으니, 碣石山 서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서 황하로 들어가는 길이 碣石山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夾右’라고 한 것이다.
顧氏 또한 “산 서쪽을 ‘오른쪽’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鄭玄은 “禹가 碣石山 서북쪽을 경유하여 가서 冀州의 지경을 다 지나고는 도로 산 동남쪽을 따라 가다가 황하로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鄭玄은 북쪽으로 가면 동쪽이 오른쪽이 되고, 남쪽으로 가면 서쪽이 오른쪽이 되기 때문에 산의 양 곁을 끼더라도 산이 항상 오른쪽에 있으니 孔安國과 다른 점이다.
梁州의 傳에서 “〈渭水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가서 河水를 건너 帝都로 돌아와 〈홍수를〉 다스리는 일을 아뢰었다.”라고 하였으니, 황하로 들어가서 거슬러 올라간 것은 帝都로 돌아가 〈홍수를〉 다스린 일을 아뢰기 위해서였다.
禹가 홍수를 다스림은 반드시 매 州마다 순행하면서 그 형세를 헤아리고 그 인력을 계산하며 規模를 설시하고 方略을 가리켜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분포해서 아울러 작업하도록 하고서 帝都로 돌아와 〈홍수를〉 다스린 일을 아뢰었다.
이때에 帝都가 황하에 가깝기 때문에 매 州마다의 아래에 모두 물에 〈배를〉 띄워 黃河에 도달함을 말하였으니, 禹가 帝都로 돌아오는 길을 기록한 것이다. 冀州‧兗州‧徐州‧荊州‧豫州‧梁州‧雍州에서는 각자 황하를 말하였고, 오직 靑州‧揚州 두 州에서만 황하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兗州에서 “濟水와 漯水에 〈배를〉 띄워 黃河에 도달하셨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靑州에서는 단지 “濟水에 도달하셨다.”라고만 말했을 뿐이고, 徐州에서 “淮水와 泗水에 〈배를〉 띄워 황하에 도달하셨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揚州에서는 “淮水와 泗水에 도달하셨다.”라고 말했을 뿐이니, 모두 禹가 황하에 들어간 길을 기록한 것이다.
王肅은 “매 州마다의 아래에 홍수를 다스린 일을 말한 것은 禹의 功이 홍수를 다스린 데 주로 있었기 때문에 〈홍수를〉 다스린 州에서 왕래할 때에 〈배를〉 타고 건너던 물 이름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肅이 비록 帝都로 돌아와 帝舜에게 아뢴 점을 말하지 않았지만, 또한 홍수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물에 〈배를〉 띄운 점을 말한 것이다. 鄭玄은 “홍수를 다스리는 일을 이미 마치고 다시 다니면서 땅의 비척을 살펴보고 貢賦의 上下를 정했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孔安國과 다르다.
八州에서는 모두 경계를 말했으나 여기서만 유독 없기 때문에 “이 州(冀州)는 帝都인지라 경계를 말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州에 이르는 곳을 가지고 보면 〈그 경계를〉 알 수 있다.”라고 풀이한 것이다.
兗州에서 말한 濟水와 河水는 東河로부터 동쪽이고, 豫州에서 말한 荊水와 河水는 南河로부터 남쪽이고,
雍州에서 말한 ‘西河’는 西河로부터 서쪽이니, 東河의 서쪽, 西河의 동쪽, 南河의 북쪽이 冀州의 경계임을 밝힌 것이다.
馬融과 鄭玄은 모두 ‘冀州에서 그 경계를 쓰지 않은 것은 당시 帝舜이 여기에 도읍하여 광활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라고 하였으나, 문장이 이미 州의 이름을 가지고 국한을 하였는데 다시 무엇 때문에 광활하게 보이려고 하였겠는가. 이것은 망령된 말이다.
또 나머지 州에서는 田을 먼저 적고 賦를 뒤에 적었는데, 이 州(冀州)에서는 賦를 먼저 적고 田을 뒤에 적은 것은 또한 경계와 같이 나머지 州와 달랐다는 식으로 풀이하였다.
‘殊’라 말한 것은 당연히 田賦는 수확을 가지고 차등을 정하고 田은 비척을 가지고 등급을 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田이 賦 위에 있다면 賦는 응당 田의 등급을 따라야 하니, 田이 비옥하면 의당 賦가 무겁게 매겨지기 마련이라, 인력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賦를 田보다 먼저 놓아서 賦는 인력으로 말미암아 정해진다는 점을 보이게 한 것이다.
이 州에서 이미 이러한 법리를 보였으므로 나머지 州는 따라서 알 수 있으니, 모두 賦를 田 아래에 놓아서 賦는 田의 소출에 따라 매겨지는 점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머지 州와 달랐다는 것이다.
鄭玄은 “이 州에서는 곡식을 납입하고 공물은 바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아래에서 “〈王城 밖 사방〉 500리는 甸服이다.”라고 한 데 대한 孔傳에서 “天子를 위하여 농사짓는 지점”이라고 하였으니, 이 田地에서 곡식을 납입하기 때문에 貢篚를 헌상하지 않는 것이 나머지 州와 차이나는 점이다.
甸服은 사방 1,000리로 한정하지만, 冀의 북쪽 땅은 경계가 워낙 멀었으며, 帝都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는 반드시 貢篚가 있었을 것이나 대략을 들어서 말했을 뿐이다.


역주
역주1 夾右碣石 入于河 : 孔傳에서는 禹가 홍수를 다스리는 경로로 보았고, 蔡傳에서는 貢賦가 冀州로 들어오는 경로로 보았다. 이하도 마찬가지다.
역주2 (也) : 문의에 따라 衍字로 처리하였다.

상서정의(2)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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