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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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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言語 中
鄧艾 口喫하여 語稱艾艾注+① 魏志曰 “艾, 字士載, 棘陽人. 少爲農人養犢. 年十二, 隨母至(頴)[潁]川, 遂名範, 字士則, 後宗族有同者, 故改焉. 每見高山大澤, 輒規度指畫軍營處所, 時人多笑焉. 後見司馬宣王, 三辟爲掾. 累遷征西將軍, 伐蜀, 蜀平, 進位太尉. 爲衛瓘所害.”하니 晉文王 戯之曰
卿云艾艾라하니 定是幾艾오하니
對曰
鳳兮鳳兮라하나 故是一鳳注+② 列仙傳曰 “陸通者, 楚狂接輿也. 好養性, 游諸名山. 嘗遇孔子而歌曰 後入蜀, 在峨嵋山中.”이니이다하다
【頭註】
王云 “倉卒對, 乃妙絶.”
劉云 “佳對.”


4. 언어 중
4-1 등애鄧艾는 말을 더듬어 말할 때에 “저…… 저……” 하자,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등애전鄧艾傳〉에 말하였다. “등애鄧艾사재士載이고 극양棘陽 사람이다. 어렸을 때에 농부를 위해 송아지를 기르는 일을 했다. 12세에 모친을 따라 영천潁川에 이르러 옛 태구현太丘縣현장縣長(진식陳寔)의 비문碑文을 읽었는데, ‘말은 세상의 모범이 되고, 행동은 선비의 준칙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보고 마침내 이름을 ‘’으로, 를 ‘사칙士則’으로 하였는데, 나중에 종족宗族 중에 같은 이름이 있었으므로 〈로〉 고쳤다. 매번 고산高山대택大澤을 보기만 하면 군영軍營처소處所를 가늠해보고 손가락으로 그려보니,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비웃었다. 나중에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만났고 세 번 속관으로 초빙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에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을 정벌하였고, 이 평정되자 벼슬이 올라 태위太尉가 되었다. 위관衛瓘에게 살해당했다.” 문왕文王(사마소司馬昭)이 놀렸다.
〈등애가〉 대답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라고 하지만 본래 한 마리입니다.”注+② ≪열선전列仙傳≫에 말하였다. “육통陸通이란 자는 나라의 광인狂人 접여接輿이다. 양생술養生術을 좋아했고 여러 명산에 노닐었다. 공자孔子와 조우하여 ‘이여, 이여! 어찌 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할 수 없지만 오는 것은 아직 따라잡을 수 있네.’라며 노래한 적이 있다. 나중에 으로 들어가 아미산峨嵋山 속에서 지냈다.”
두주頭註
왕세무王世懋:창졸간의 대답인데 절묘하다.
유신옹劉辰翁:훌륭한 대답이다.


역주
역주1 卿은……명이오 : 옛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자신을 뜻하는 1인칭 대명사처럼 썼다.
역주2 讀故太丘長碑文曰……行爲士則 : ≪三國志≫ 〈魏志 鄧艾傳〉에는 ‘言’이 ‘文’으로 되어 있으며, ≪文選≫과 ≪蔡中郎集≫에 실린 蔡邕의 〈陳太丘碑文〉에는 “文爲德表 範爲士則(문장은 덕의 표준이 되고, 법도는 선비의 준칙이 되었다.)”으로 되어 있다.
역주3 鳳兮鳳兮……來者猶可追 : ≪論語≫ 〈微子〉에 보인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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