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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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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曇首注+① 李延壽南史曰 “王曇首, 太保弘之弟. 幼有素尙, 兄弟分財, 曇首唯取圖書而已. 辟瑯琊王大司馬屬.” 年十四五 便歌 諸妓 向謝公注+② 靈運.稱歎하니 甚欲聞之 而王 名家年少일새 無由得聞하고 諸妓 又向王說謝公意
出東府土山上하여 作伎할새 時作兩丸髻하고 著袴褶하고 騎馬하여 往土山下 庾家墓林中하여 作一曲歌
于時 秋月하니 因擧頭하여 看北林하고 卒曲 便去 白謝公曰
此是王郎歌라하다


26-10 【왕담수王曇首注+의 ≪남사南史≫ 〈왕담수열전王曇首列傳〉에 말하였다. “왕담수王曇首태보太保 왕홍王弘의 아우이다. 어릴 때부터 소박하고 고상했는데, 형제들이 재산을 나눌 때 왕담수는 단지 책만 취했을 뿐이었다. 낭야왕瑯琊王대사마大司馬의 속관으로 초빙되었다.” 나이 14,5세에 노래를 잘 불렀다. 여러 기녀들이 사공謝公(사영운謝靈運)에게注+② 〈사공謝公〉은 사영운謝靈運이다. 〈그의 노래를〉 칭찬하자, 사공이 그 노래를 매우 듣고 싶었지만 왕담수가 명문가의 젊은이였기 때문에 들어볼 길이 없었다. 여러 기녀들이 또 왕담수에게 사공의 뜻을 말하였다.
사공이 이후에 에 있는 위로 가서 풍악을 울리면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왕담수가 그때 쌍상투를 틀고 승마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토산 아래에 있는 유씨庾氏 집안의 묘림墓林 속으로 들어가 노래 한 곡조를 불렀다.
그때는 〈맑은〉 가을 달이 떠 있었는데, 왕담수가 이로 인해 머리를 들어 북쪽 숲을 바라보고 노래를 마친 뒤에 곧장 떠났다. 기녀들이 사공에게 아뢰었다.
“이것이 바로 왕랑王郎(왕담수)의 노래입니다.”


역주
역주1 李延壽 : 唐 相州 사람으로, 字는 廷齡이다. 太宗 貞觀 연간(627~649)에 太子典膳丞․崇賢館學士를 역임하고, 이후에 御史臺主簿가 되고 符璽郎 겸 修国史에 이르렀다. 관찬 ≪隋書≫․≪五代史≫의 〈志〉 및 ≪晉書≫ 편찬에 참가했고, 개인적으로 ≪南史≫․≪北史≫와 ≪太宗政典≫을 편찬하였다. ≪남사≫와 ≪북사≫는 그의 부친 李大師의 작업을 이어 완성한 것인데, ≪남사≫는 南朝의 宋ㆍ南齊ㆍ梁ㆍ陳의 역사 80권을, ≪북사≫는 北朝의 魏ㆍ北齊ㆍ周ㆍ隋의 역사 100권이다. 완성된 뒤에 高宗에게 表文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역주2 司馬德文 : 386~421. 字는 德文으로, 東晉의 마지막 황제이다. 처음에 瑯琊王에 봉해지고, 이후에 中軍將軍․散騎常侍․衛將軍․開府儀同三司․侍中․司徒 등을 역임했다. 安帝가 桓玄에 의해 폐위되었을 때 그는 안제와 함께 潯陽에 있었고, 환현이 패배하여 죽은 뒤에는 江陵으로 옮겨졌다. 元熙 1년(419)에 劉裕가 안제를 죽이고 그를 황제로 세웠다. 2년 6월에 그는 유유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零陵王으로 강등되고, 9월에 유유가 사람을 파견하여 솜이불로 눌러 질식시켜 죽였다.
역주3 東府城 : 南京市 秦淮区 通济门 부근에 있었던 성으로, ‘东城’이라고도 하는데, 東晉과 南朝의 재상 겸 揚州刺史의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역주4 土山 : 東土山으로, 東晉의 謝安이 金陵城 동남쪽에 會稽의 東山을 본떠서 쌓은 산이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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