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구陳太丘(진식陳寔), 〈그의 아들〉 진기陳紀, 진기의 아들 진군陳羣은 모두 명성이 높았는데,注+①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진식陳寔은 젊어서부터 맑은 덕을 드러냈고 조정에서 부르는 명을 연달아 사양하였으며 문을 닫아걸고 수레를 걸어두고서 한가로이 쉬며 노년을 보냈다. 중평中平 4년(187)에 집에서 죽었다.”
에 말했다. “진식이 죽자 천하 사람들이 조문했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3만 명이었고 상복을 지어 입은 사람이 백 명이 넘었다.”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진기陳紀도 지극한 덕으로 칭송을 받았다. 형제 〈모두〉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고 가정이 화목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말했다. “노국魯國의 공융孔融은 재주가 높고 거만했는데 나이는 진군陳羣과 진기陳紀 중간이었다. 먼저 진기와 벗했다가 나중에 진군과 교제하게 되자 〈진군의 부친인〉 진기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천하 사람들은 ‘공公(진군)은 경卿(진기)에게 부끄럽고 경은 장長(진식)에게 부끄럽다.’라고 하였다.注+②
진기陳紀, 진기의 아들 사공司空인 진군陳羣, 진군의 아들 진태陳泰는 4대에 걸쳐 한漢과 위魏 두 나라에서 모두 명망이 있었으나 그 덕은 점차 줄어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公은 경卿에게 부끄럽고, 경卿은 장長에게 부끄럽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에는 실려 있지 않고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傅子≫ :
晉나라의 傅玄(217~278)이 편찬하였고, 주로 儒家사상을 선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儒家類에 속한다. ≪隋書≫ 〈經籍志〉와 ≪新唐書≫ 〈藝文志〉에는 140권이라 하였으나, 唐宋시기에 점차 散失되어 ≪宋史≫ 〈藝文志〉에는 5권이라 하였다. 淸나라 때 집록한 輯本 여러 종이 있다.
역주3≪博物記≫ :
≪博物志≫라고도 한다. ≪隋書≫․≪舊唐書≫․≪新唐書≫에 따르면 晉나라의 張華가 지었으며 10권이다. 현재는 일부만 전한다.
역주4縣長 :
현의 장관이다. 인구가 萬戶 이상이면 縣令으로, 만호 이하면 縣長이라고 칭했다.
역주5鴻臚 :
官署의 이름으로 최고 책임자는 卿 또는 正卿으로 불렸다. 빈객을 접대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는데, 周나라 때는 大行人, 秦과 漢나라 초기에는 典客으로 불렸으며, 景帝 6년에 大行令, 武帝 太初 원년에 大鴻臚로 명칭이 바뀌었다. 東漢 이후에는 주로 조정의 제례의식을 관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