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崔瞻 才學 風流 爲後來之秀注+① 北史曰 “瞻, 字彥通, 㥄之子也. 潔白善容止, 祌彩嶷然, 言不妄發, 才學風流, 後來之秀. 魏孝靜嘗人日登雲龍門, 㥄․瞻皆侍宴, 有應詔詩, 帝問邢卲曰 ‘贍詩, 何如其父?’ 卲曰 ‘㥄博雅弘麗, 贍氣調淸新, 竝詩人之冠.’ 讌罷, 共嗟賞之, 咸曰 ‘今日之讌, 幷爲崔瞻父子.’” 侍中李神儁 晚年無子 語邢劭曰
昨見崔㥄兒하니 便爲後生第一이라 我遂無此物이니 使人傷懷라하다


26-13 【최첨崔瞻은 재능과 학문과 풍류가 후생 가운데 으뜸이었다.注+① ≪북사北史≫ 〈최첨열전崔瞻列傳〉에 말하였다. “최첨崔瞻언통彥通으로, 최릉崔㥄의 아들이다. 〈성품이〉 고결하고 행동거지가 훌륭하며, 풍채가 단아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재능과 학문과 풍류가 후생 가운데 으뜸이었다. 〈북조北朝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원선견元善見)가 한번은 운룡문雲龍門에 올랐는데, 최릉과 최첨이 모두 연회에서 모셨다. 응제시를 시었는데, 효정제가 형소邢卲에게 ‘최첨의 시는 그의 부친과 비교하면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형소가 ‘최릉은 내용이 풍부하면서 장중하고 표현이 우아하면서 화려하며, 최첨은 기운이 맑고 새로우니, 모두 시인 가운데 으뜸입니다.’라고 하였다. 연회가 끝나자, 함께 〈그들의 시에〉 감탄하면서 모두 ‘오늘의 연회는 모두 최첨 부자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중侍中 이신준李神儁은 만년에도 아들이 없었는데, 형소邢劭에게 말하였다.
“어제 의 아들(최첨)을 보았는데, 정말 후생 가운데 제일이었소. 나는 결국 이런 아들을 두지 못할 것이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역주
역주1 人日 : 음력 1월 7일을 이른다. 이날은 佳節이라 일곱 가지 나물을 넣고 끓인 국을 먹고 채색 천, 또는 華勝(머리를 꾸미는 꽃 모양의 장식물)을 만들어 서로 보내주며, 栢葉酒로 서로 축하하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웠다.(≪荊楚歲時記≫)
역주2 崔㥄 : 494~554. 淸河郡 武城縣 사람으로, 본명은 崔甗(최언)이고, 별명은 최릉․崔鸊(최벽)이며, 字는 長孺이다. 北朝 北魏 宣武帝(元恪) 때에 太學博士가 되고, 孝明帝(元詡) 때에 어떤 일 때문에 면직되어 낙향하였다. 이후에 東道大行臺 高歡을 따라 信都에서 거병하여 咨議參軍이 되고, 고환이 洛陽에 입성했을 때 건의하여 節閔帝(元恭)를 폐위했다. 군공으로 武城縣公에 봉해지고 車騎大將軍으로 승진했다. 北齊가 건국된 후에 侍中이 되고, 文宣帝(高洋) 天保 5년(554)에 東兖州刺史가 되었는데, 寵妾 馮氏가 뇌물을 받고 음란한 행실이 있다고 하여 탄핵받아 수감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