桓靈寳
注+① 玄小名也. 事別見.가 征殷仲堪
에 道出廬山
注+② 豫章舊志曰 “廬俗, 字君孝, 本姓匡, 夏禹苗裔, 東野王之子. 秦末百越君長與吳芮, 助漢定天下, 野王亡軍中. 漢八年封俗鄢陽男, 食邑玆部, 印曰廬君俗. 兄弟七人皆好道術, 遂寓于洞庭之山, 故世謂廬山. 孝武元封五年南巡狩, 浮江親覩神靈, 乃封俗爲太明公, 四時秩祭焉.” 遠法師廬山記曰 “山在江州尋陽郡, 左挾彭澤, 右傍通川. 有匡俗先生出自殷周之際, 遁世隱時, 潜居其下. 或云匡俗受道於仙人, 而共遊其嶺, 遂託室崖岫, 即巖成館. 故時人謂爲神仙之廬而命焉.” 法師遊山記曰 “自託此山, 二十三載再踐石門, 四遊南嶺. 東望香罏峯, 北眺九江. 傳聞有石井方湖, 中有赤鱗踊出, 野人不能, 直歎其奇而已矣.” 伏滔遊廬山序曰 “廬山者, 江陽之名嶽. 蟠根所據, 亘數百里, 重嶺傑嶂, 仰揷雲日, 俯瞰川湖之流焉.”하여 因詣遠公
하고 語次及征討之意
하되 遠
이 不答
이라 又問
實乃生所未見
注+③ 張野遠法師銘曰 “沙門釋惠遠, 鴈門樓煩人, 本姓賈氏, 世爲冠族. 年十二, 隨舅令狐氏遊學許洛. 年二十一, 欲南渡, 就范宣子學, 道阻不通. 遇釋道安以爲師, 抽簪落髮, 硏求法藏. 釋曇翼每資以燈燭之費. 鑒淹遠, 高悟冥賾. 安常歎曰 ‘道流東國, 其在遠乎.’ 襄陽旣沒, 振錫南遊, 結宇靈嶽. 自年六十, 不復出山. 名被流沙, 彼國僧衆皆稱漢地有大乘沙門, 每至然香禮拜, 輒東向致敬. 年八十三而終.” 慧皎高僧傳曰 “慧遠至潯陽, 見廬峯淸靜, 始住龍泉精舍.”이라하다
4-74【
보補】
환령보桓靈寳(
환현桓玄)가
注+① 〈영보靈寳는〉 환현桓玄의 어릴 적 이름이다. 〈환현의〉 일은 따로 보인다.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러 가는 길에
여산廬山을 지나게 되어
注+② ≪예장구지豫章舊志≫에 말하였다. “여속廬俗은 자字가 군효君孝이고 본래의 성姓은 광씨匡氏로,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후예이며 동야왕東野王의 아들이다. 진秦나라 말기에 의 군장君長이 오예吳芮와 함께 한漢나라를 도와 천하天下를 평정하였는데, 동야왕은 그 군중軍中에서 전사하였다. 한나라 8년(B.C. 199)에 여속을 언양남鄢陽男에 봉하고 자부玆部를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하사한〉 인장에 ‘여군속廬君俗’이라고 하였다. 형제兄弟 7명이 모두 도술道術을 좋아하여 마침내 동정산洞庭山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 산을 여산廬山이라고 불렀다. 한漢 효무제孝武帝(유철劉徹)가 원봉元封 5년(106)에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면서 강에 배를 띄워 〈산의〉 신령神靈함을 직접 목도하고 이에 여속을 태명공太明公으로 봉하고 사시四時마다 제사를 지냈다.”
혜원법사慧遠法師의 ≪여산기廬山記≫에 말하였다. “여산은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에 있는데 왼쪽으로는 팽택彭澤을 끼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통천通川을 옆에 두고 있다. 광속선생匡俗先生(여속廬俗)이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교체기에 나와 세상과 시대를 피해 그 아래에 은거하였다. 혹은 광속匡俗이 선인仙人에게 도道를 전수받고 함께 그 산의 고개에 노닐다가 마침내 벼랑의 굴에 기거하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신선神仙의 여막廬幕이라고 부르고 〈여산이라고〉 명명하였다.”
혜원법사의 ≪유산기遊山記≫에 말하였다. “이 산에 의탁하고부터 23년 동안 두 번 석문石門을 밟았고 네 번 남령南嶺을 유람했다. 〈이 산은〉 동쪽으로 향로봉香罏峯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구강九江을 조망한다. 전해 듣기로는 석정방호石井方湖가 있고 그 안에 붉은 비늘의 물고기가 〈물위로〉 뛰어 오르는데, 야인野人들이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다만 그 기이함을 감탄할 뿐이라고 한다.”
복도伏滔의 〈유려산서遊廬山序〉에 말하였다. “여산은 장강長江 북쪽의 이름난 산이다. 산의 구불구불한 뿌리가 수백 리에 걸쳐있고, 첩첩의 고개와 높은 봉우리는 구름과 해를 찌를 듯 솟아있으며, 강과 호수의 물이 흐르는 것을 굽어본다.” 원공遠公(
혜원慧遠)을 방문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벌의 취지를 언급하였는데 원공이 답하지 않았다. 환영보가 다시 물었다.
혜원慧遠
“
께서
안온安穩하게 저들을 다루시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환영보가 여산을 나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참으로 평생에 보지 못한 분이다.”
注+③ 장야張野의 〈혜원법사명慧遠法師銘〉에 말하였다. “사문沙門 석혜원釋惠遠은 안문鴈門 누번樓煩 사람으로 본성本姓은 가씨賈氏이고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다. 20살에 외숙부 영호씨令狐氏를 따라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에서 유학하였다. 21살에 남쪽으로 건너가 범선자范宣子(범선范宣)에게 가서 배우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 석도안釋道安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서 비녀를 뽑고 머리를 깎고는 불법을 연구硏求하였다. 석담익釋曇翼이 매번 등촉燈燭의 비용을 대주었다. 외우고 본 것은 깊고도 넓었으며 높은 깨달음은 심오深奧하였다. 석도안이 항상 감탄하며 ‘도道가 동쪽 나라(중국中國)에 흐르는 것은 혜원에게 달려 있도다.’라고 하였다. 양양襄陽이 함락되자 석장錫杖을 짚고 일어나 남쪽에서 돌아다니다가 영악靈嶽(여산廬山)에 집을 지었다. 60세부터 다시는 산을 나서지 않았다. 이름이 유사流沙(서역西域의 사막 지역)에 퍼져 그 나라의 승려들이 중국 땅에 대승사문大乘沙門이 있다고 칭송하고, 매번 향을 피우고 예배禮拜할 때마다 동쪽을 향해 예를 올렸다. 83세에 생을 마쳤다.”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에 “혜원慧遠이 심양潯陽에 이르러 여산의 봉우리가 청정淸靜한 것을 보고 비로소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