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晏
이 爲吏部尙書
에 有位望
하니 時
에 談客盈坐
注+① 文章敍錄曰 “晏, 能淸言, 而當時權勢․天下談士, 多宗尙之.” 魏氏春秋曰 “晏, 少有異才, 善談易․老.”라 王弼
이 未弱冠
에 往見之
한대 晏聞弼名
注+② 弼別傳曰 “弼, 字輔嗣, 山陽高平人. 少而察惠, 十餘歲, 便好莊․老. 通辯能言, 爲傅嘏所知. 吏部尙書何晏甚奇之, 題之曰 ‘後生可畏, 若斯人者, 可與言天人之際矣.’ 以弼補臺郎. 弼事功雅非所長, 益不留意, 頗以所長笑人, 故爲時士所嫉. 又爲人, 淺而不識物情. 初與王黎․荀融善, 黎奪其黃門郎, 於是恨黎, 與融亦不終好. 正始中, 以公事免, 其秋, 遇癘疾亡, 時年二十四. 弼之卒也, 晉景帝嗟歎之累日, 曰 ‘天喪予.’ 其爲高識悼惜, 如此.”이라 因條向者勝理
하여 語弼曰
弼便作難
에 一坐人
이 便以爲屈
이라 於是
에 弼
이 自爲客主數番
하니 皆一坐所不及
注+③ 語林曰 “何平叔以爲聖人無喜怒哀樂, 其論甚精, 鍾士季諸人述之. 王輔嗣, 意頗不同, 以爲 ‘聖人茂於人者, 神明也, 同於人者, 五情也. 神明茂, 故能體冲和以通無, 五情同, 故不能無哀樂以應物. 然則聖人之情, 應物而無累於物者也. 今以其無累, 便謂不復應物, 失之遠矣.’ 世以王理爲得.” 魏氏春秋曰 “弼論道, 約美不如晏, 自然出拔過之.”이라
8-3
하안何晏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을 때 지위와 명성이 있었으니, 당시에 논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注+① 〈문장서록文章敍錄〉에 말하였다. “하안何晏은 에 능력이 있어 당시의 권세가들과 천하의 논객들이 대부분 그를 존중하고 숭상하였다.”
의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말하였다. “하안은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뛰어난 재주를 지녔고, ≪주역周易≫과 ≪노자老子≫에 대해 훌륭하게 담론하였다.” 왕필王弼이 나이 스물이 채 되기 전에 하안을 찾아가 만났다. 하안은 왕필의 명성을 들어왔기 때문에
注+② 의 〈왕필별전王弼別傳〉에 말하였다. “왕필王弼은 자字가 보사輔嗣로, 산양山陽의 고평高平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10여 세에 이미 ≪장자莊子≫와 ≪노자老子≫를 좋아하였다. 변론에 통달하고 담론에 능하여 부하傅嘏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부상서吏部尙書 하안은 그를 매우 훌륭히 여겨 칭찬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함께 논의할 만하다.’ 하고 품평하고는 왕필을 대랑臺郎(상서랑尙書郞)에 보임하였다. 그러나 왕필은 실제적인 업무에는 평소에 잘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장점으로 타인을 적지 않게 비웃었기 때문에 당시의 인사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또 사람됨이 천박하고 물정物情을 알지 못하였다. 처음에 왕려王黎․순융荀融과 관계가 좋았는데, 왕려가 그의 황문랑黃門郎 직위를 빼앗자 이에 왕려를 미워하였고, 순융과도 끝까지 좋게 지내지는 못하였다. 정시正始 연간(240∼249)에 공사公事(소송)에 걸려 면직되고 그해 가을에 역질에 걸려 사망했으니, 당시 나이가 24세였다. 왕필이 사망하자 서진西晉 경제景帝(사마사司馬師)가 며칠 동안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하였다. 그가 식견 높은 사람에게 애도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일전에 〈벌였던〉
담론談論 가운데 뛰어난 논리를 골라 왕필에게 물었다.
“이 논리를 나는 더할 나위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다시 논박할 수 있겠소?”
왕필이 즉시 논박하자 좌중의 모든 사람이 바로 〈하안이〉 졌다고 여겼다. 이에 왕필이 몇 차례 스스로 손님의 입장이 되어 〈문제를 제출하고〉
그의 모든 논리에 대해〉 좌중의 모든 사람이 미치지 못하였다.
注+③ 에 말하였다. “하평숙何平叔(하안何晏)이 성인聖人에게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없다고 했는데, 그 논리가 매우 정밀하여 종사계鍾士季(종회鍾會) 등 여러 인사들이 그 견해를 따랐다. 왕보사王輔嗣(왕필王弼)는 〈이들과는〉 생각이 자못 달랐다. 그는 ‘성인이 일반인보다 뛰어난 점은 신명神明(정신력․사고력)의 측면이고, 일반인과 같은 점은 오정五情(희노애악원喜怒哀樂怨)의 측면이다. 신명神明이 뛰어나기 때문에 을 체득하여 만물의 근원인 무無에 통할 수 있고, 오정五情이 같기 때문에 만사에 대응하는 희로애락 등의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성인의 감정은 만사에 대응하되 만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 만일 얽매이지 않는 측면을 가지고 곧장 더 이상 만사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세상에서는 왕필의 논리가 옳다고 하였다.”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말하였다. “도道에 대한 왕필의 담론은, 간결한 아름다움은 하안보다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빼어난 것은 하안보다 뛰어나다.”
注
◦ 이지李贄:〈〈왕필별전王弼別傳〉에서 말한〉 ‘식견이 높은 사람’은 순봉천荀奉倩(순찬荀粲)과 같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