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사촌동생인〉
왕서王緒와 〈사촌형인〉
왕국보王國寳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 밀접한 관계로 함께 권력을 주물렀다.
注+① ≪왕씨보王氏譜≫에 말했다. “왕서王緖는 자字가 중업仲業으로 태원太原 사람이다. 조부는 왕연王延이며 부친 왕예王乂는 무군장군撫軍將軍이었다.”
≪진안제기晉安帝紀≫에 말했다. “왕서는 회계왕會稽王(사마도자司馬道子)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어 아첨과 간사함으로 총애를 받았다. 왕순王珣ㆍ왕공王恭은 왕국보王國寳와 왕서가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해 은중감殷仲堪과 함께 기일을 정해 같이 거사하여 안으로 조정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왕공의 표문表文이 이르자 〈안제安帝는〉 이에 왕서를 참수하여 제후들을 달랬다.
왕국보는 평북장군平北將軍 왕탄王坦의 셋째 아들이다. 태부太傅 사안謝安은 왕국보의 장인인데 그를 싫어하여 물리치고 쓰지 않았다. 사안이 죽고 (사마도자)이 국정을 보좌하게 되자 〈왕국보는〉 중서령中書令으로 옮겼으며 수백 명의 첩을 두었다. 종제從弟인 왕서는 상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국보를〉 위해 좋은 말을 많이 하여 왕국보의 권세가 조정의 안팎에 진동하게 되었다. 왕순王珣ㆍ왕공王恭ㆍ은중감殷仲堪은 효무제孝武帝(사마요司馬曜)에게 대우를 받았으나 상왕의 눈에는 들지 못했다. 왕공이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왕국보의 죄를 성토하고 차윤車胤도 간쟁하였다. 회계왕은 제후들의 군대를 막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왕국보에게 죄를 떠넘기고 에게 회부하여 사사賜死하였다.” 〈왕국보의 동생인〉
왕대王大가 그들의 이런 행동에 불만을 품고 왕서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