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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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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玄欲以謝太傅宅爲營하니 謝混曰
召伯之仁 猶惠及甘棠注+① 韓詩外傳曰 “昔周道之隆, 召伯在朝, 召伯曰 ‘以一身勞百姓, 非吾先君文王之志也.’ 乃暴處於棠下而聽訟焉. 詩人見召伯休息之棠, 美而歌之曰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이나 文靖之德 更不保五畝之宅이라하니
玄慚而止하다


20-8 환현桓玄사태부謝太傅(사안謝安)의 집을 군영軍營으로 만들려고 하자, 〈사태부의 손자인〉 사혼謝混이 말했다.
注+①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말했다. “옛날 나라의 가 융성했을 때 소백召伯이 조정에 있었는데 유사有司가 백성들을 소환하기를 청하자, 소백이 ‘나 한사람 때문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나의 선군先君이신 문왕文王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팥배나무 아래에서 위를 가릴 지붕도 없이 있으면서 송사를 처리하였다. 시인詩人이 소백이 휴식을 취하던 팥배나무를 보고 찬미하며 노래하기를 ‘무성한 팥배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이 노숙하셨던 곳이니라.’라고 하였다.” 은덕恩德을 베풀었는데 더 이상 5의 집도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환현이 부끄러워하며 〈그 일을〉 중지하였다.
소공召公소공召公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있으나, 이 일화는 ≪何氏語林≫에는 실려 있지 않고, ≪世說新語≫에 실려 있으므로 ‘補’자를 삭제하였다.
역주2 召伯(召公)은……있건만 : 召公은 周 文王의 아들로 이름은 奭이다. 武王 때 西伯으로서 정사를 베풀면서 팥배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소공이 떠난 뒤에 백성들이 소공의 덕을 그리워하여 그 팥배나무를 소중히 여겼다.
역주3 文靖公 : ‘문정’은 사안의 諡號이다.
역주4 : ‘묘’는 면적의 단위로 혹자에 따라서 대략 지금의 30평 또는 600제곱미터 정도라고 하나 정확한 넓이는 알 수 없다. 周나라 때에는 6尺이 1步이고 100步가 1畝였고, 秦나라와 漢나라 때에는 5尺이 2步, 240步가 1畝였으며, 唐나라 때에는 너비 1步에 길이 240步가 1畝였다.
역주5 有司請召民 : ≪韓詩外傳≫에는 ‘有司請營邵以居(유사가 소읍에 집을 짓고 거처하도록 요청하였다.)’로 되어 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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