摯瞻
이 曾作四郡太守
와 大將軍户曹叅軍
하고 復出
하여 作内史
注+① 摯氏世本曰 “瞻, 字景游, 京兆長安人, 太常虞兄子也. 父育, 凉州刺史. 瞻少善屬文, 起家著作郞. 中朝亂, 依王敦爲戶曹叅軍, 歷安豐․新蔡․西陽太守. 見敦以故壞裘賜老病外部都督, 瞻諫曰 ‘尊裘雖故, 不宜與小吏.’ 敦曰 ‘何爲不可.’ 瞻時因醉曰 ‘若上服皆可用賜, 貂蟬亦可賜下乎.’ 敦曰 ‘非喩所引. 如此, 不堪二千石.’ 瞻曰 ‘瞻視去西陽, 如脫屣耳.’ 敦反, 乃左遷隨內史.”하니 年始二十九
라 嘗别王敦
注+② 敦別傳曰 “敦, 字處仲, 瑯琊臨沂人. 少有名理. 累遷靑州刺史. 避地江左, 歷侍中․丞相․大將軍․州牧, 以罪伏誅.”하니 敦
이 謂瞻曰
卿은 年未三十이어늘 已為萬石하니 亦太蚤로다하니
方於將軍
하면 少為太蚤
나 比之甘羅
하면 已為太老
注+③ 摯氏世本曰 “瞻, 高亮有氣節, 故以此答敦. 後知敦有異志, 建興四年, 與第五琦據荊州以距敦, 竟爲所害.” 史記曰 “甘羅, 秦相茂之孫也. 年十二, 而秦相呂不韋欲使張唐相燕, 唐不肯行, 甘羅說而行之. 又請車五乘以使趙, 還報秦, 秦封甘羅爲上卿, 賜以甘茂田宅.”니이다하다
4-27
지첨摯瞻이 일찍이 네
군郡의
태수太守와
대장군大將軍(
왕돈王敦)의
호조참군户曹參軍이 되었고, 다시 〈벼슬에〉 나와
내사内史가 되었는데
注+① ≪지씨세본摯氏世本≫에 말하였다. “지첨摯瞻은 자字가 경유景游이고 경조京兆 장안長安 사람으로 태상太常인 지우摯虞의 형兄의 아들이다. 부친 지육摯育은 양주자사凉州刺史였다. 지첨은 어려서 글을 잘 지어 저작랑著作郞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중조中朝(서진西晉)가 어지러워지자 왕돈王敦에게 의지하여 호조참군戶曹參軍이 되었으며 안풍安豐․신채新蔡․서양西陽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왕돈이 오래된 낡은 갖옷을 늙고 병든 에게 주는 것을 보고 지첨이 ‘장군의 갖옷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소리小吏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왕돈이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지첨은 이때 취기로 인해 ‘만약 윗사람의 옷을 모두 하사할 수 있다면 도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돈이 ‘비유로 든 것이 적절하지 않다. 이와 같아서는 를 감당할 수 없다.’라고 하자, 지첨이 ‘제게는 서양西陽을 떠나는 것이 신발을 벗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이에 〈지첨을〉 수군내사隨郡內史로 좌천시켰다.” 〈이때〉 나이가 갓 29세였다. 한번은
왕돈王敦에게
注+② 〈왕돈별전王敦別傳〉에 말하였다. “돈敦은 자字가 처중處仲이고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논리論理에 뛰어났다. 여러 벼슬을 거쳐 청주자사靑州刺史가 되었다. 난을 피해 강좌江左(동진東晉)에 가서 시중侍中․승상丞相․대장군大將軍․양주목揚州牧을 거쳤고, 죄로 인해 주살誅殺되었다.” 작별 인사를 고하자 왕돈이 지첨에게 말했다.
“
경卿은 나이가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의 봉록을 받는 지위가 되었으니 너무 이르다.”
“
장군將軍(왕돈)에 비하면 조금은 너무 이르겠지만
감라甘羅에 비하면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注+③ ≪지씨세본摯氏世本≫에 말하였다. “지첨摯瞻은 고상高尙하고 충정忠正하였으며 패기와 절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로 왕돈王敦에게 대답하였다. 나중에 왕돈이 다른 뜻을 품었다는 것을 알고 건흥建興 4년(316)에 제오기第五琦와 함께 형주荊州를 근거지로 삼아 왕돈에게 저항하였다가 마침내 살해당했다.”
≪사기史記≫ 〈감무열전甘茂列傳〉에 말하였다. “감라甘羅는 진秦나라 재상 감무甘茂의 손자이다. 12살 때에 진나라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장당張唐을 연燕나라의 상국相國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장당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감라가 설득하여 가도록 하였다. 또 진나라에서는 상경上卿으로 봉하고 〈조부인〉 감무의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