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勉
이 爲吏部尙書
注+① 梁書曰 “徐勉, 字脩仁, 東海郯人. 祖長宗, 宋高祖覇府行參軍, 父融, 南昌相. 勉幼孤貧, 早勵淸節. 六歲時, 屬霖雨, 家人祈霽, 率爾爲文, 見稱耆宿. 及長, 篤志好學, 起家國子生, 王儉爲祭酒, 稱勉有宰輔之量. 歷官侍中, 諡簡肅.”에 嘗與門人夜集
한대 客有求詹事五官
하니 勉
이 正色答云
時人
이 服其無私
注+② 勉嘗爲書, 戒子崧曰 “吾家世淸廉, 常居貧素, 至産業之事, 所未嘗言, 非直不經營而已. 薄躬遭逢, 遂至今日, 尊官厚祿, 可謂備之. 每念叨竊若斯, 豈由才致? 仰藉先代風範, 故臻此耳. 古人‘以淸白遺子孫, 不亦厚乎?’ 又曰 ‘遺子黃金滿籯, 不如一經.’ 詳求此言, 信非徒語. 吾實有本志, 庶得遵奉斯義, 不敢墜失. 所以顯貴以來, 門人․故舊, 亟薦便宜, 或使創闢田園, 或勸興立邸店, 又欲舳艫運致, 亦令貸殖聚歛, 若此事, 皆距而不納, 非謂拔葵去織, 且欲省息紛紜. 中年聊於東田營小園者, 非在播藝, 以要利入, 正欲穿池種樹, 少寄情賞. 又以郊際閑曠, 終可爲宅, 儻獲懸車致事, 實欲歌哭於斯. 慧日․十住等, 旣應營婚, 又須住止, 吾淸明門宅, 無相容處, 所以爾者, 亦復有以. 前割西邊施宣武寺, 旣失西廂, 不復方幅. 意亦謂此逆旅舍耳, 何事須華? 常恨時人謂是我宅. 古往今來, 豪富繼踵, 高門甲第, 連闥洞房, 宛其死矣, 定是誰室? 但不能不爲培塿之山, 雜以花卉, 以娛休沐, 用託性靈. 隨便架立, 不在廣大, 所以內中逼促, 無復房宇. 近營東邊兒孫二宅, 乃藉十住南還之資, 旣牽挽不至, 又不可中塗而輟, 郊間之園, 遂不辦保, 貨與韋黯, 乃獲百金, 成就兩宅, 已消其半. 尋園價所得, 何以至此? 由吾經始歷年, 麄已成立, 桃李茂密, 桐竹成陰, 塍陌交通, 渠畝相屬, 華樓逈榭, 頗有臨眺之美, 孤峰叢薄, 不無糾紛之興, 瀆中竝饒菰蒲, 湖裏殊富芰蓮. 雖云人外, 城闕密邇, 韋生欲之, 亦雅有情趣. 追述此事, 非有吝心, 蓋是筆勢所至耳, 憶謝靈運山家詩云 ‘中爲天地物, 今成鄙夫有.’ 吾此園, 有之二十載矣, 今爲天地物, 物之與我, 相校幾何哉? 此吾所餘, 今以分汝, 營小田舍, 親累旣多, 理亦須此. 且釋氏之敎, 以財物謂之外命, 儒典亦稱 ‘何以聚人? 曰財.’ 況汝曹常情, 安得忘此? 聞汝所買姑熟田地, 甚爲舃鹵, 彌復何安? 孔子曰 ‘居家理治, 可移於官.’ 旣以營之, 宜使成立, 進退兩, 更貽恥笑. 若有所收穫, 汝可自分贍, 內外大小, 宜令得所, 非吾所知, 又復應沾之諸女耳, 汝旣居長, 故有此及. 凡爲人長, 殊復不易, 當使中外諧緝, 人無間言. 先物後己, 然後可貴, 老生云 ‘後其身, 而身先.’ 若能爾者, 更招巨利, 汝當自勖. 見賢思齊, 不宜忽略以棄日也, 棄日乃是棄身, 身名美惡, 豈不大哉? 今之所敕, 略言此意. 正謂爲家已來, 不事資産, 陳其始末, 無愧懷抱. 兼吾年時朽暮, 心力稍殫, 牽課奉公, 略不克擧, 其中餘暇, 裁可自休. 或復冬日之陽․夏日之陰, 良辰美景, 文案間隙, 負杖躡屩 逍遙陋館, 臨池觀魚, 披林聽鳥, 濁酒一杯, 彈琴一曲, 求數刻之暫樂, 庶居常以待終, 不宜復勞家間細務. 汝交關旣定, 吾不復言及田事, 汝亦勿復與吾言之. 假使堯水․湯旱, 吾豈知如何? 若其滿庾盈箱, 爾之幸遇, 竝無俟令吾知也. 記云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 今且望汝全吾此志, 則無所恨矣.”하다
11-39 【
보補】
서면徐勉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을 때,
注+① ≪양서梁書≫ 〈서면렬전徐勉列傳〉에 말하였다. “서면은 자字가 수인脩仁으로, 동해東海 담郯 사람이다. 조부 서장종徐長宗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고조高祖(유유劉裕) 패왕부覇王府의 행참군行參軍을, 부친 서융徐融은 남창상南昌相을 역임하였다. 서면은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가난했으나, 일찍부터 청렴한 절조에 힘썼다. 6세 때에 마침 장맛비가 계속되어 집안사람들이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려고 했는데, 〈서면이〉 즉시 문장을 지어 노사숙유老師宿儒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장성해서는 의지를 다지고 학문을 좋아하여 〈향시鄕試 합격생도 아닌 상태에서〉 국자감國子監 학생이 되었는데, 국자감 좨주祭酒로 있던 이 왕면을 칭찬하여 재보宰輔(재상)의 기량을 지녔다고 하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시중侍中이 되었고, 시호는 간숙簡肅이다.” 한번은 문인들과 함께 밤에 회합하였다. 손님 가운데
첨사오관랑詹事五官郞을 청하는 사람이 있자, 서면이 정색하면서 대답하였다.
“오늘밤은 단지 풍월風月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고 공적인 일을 언급하는 것은 마땅치 않소.”
당시 사람들이 그의 사심 없음에 탄복하였다.
注+② 서면徐勉이 일찍이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아들 서숭徐崧을 훈계하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렴결백하여 항상 빈한하게 살아와서 〈재산을 일구는〉 산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니 단지 도모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었다. 못난 내가 〈성군聖君을〉 만나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으니, 높은 관직 많은 봉록은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매번 생각건대, 외람되이 차지한 관직과 봉록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나의〉 재주에 의한 것이겠느냐. 위로 선조들의 풍모와 기량에 의지했기 때문에 이런 수준에 이른 것이다.
하였고, 또 하였으니, 이런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찾아보면 진실로 괜히 한 말씀이 아니다. 나는 실로 본래 이런 뜻을 두었으니, 이러한 의리를 따라 실천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현달한 이후로 문도들과 벗들이 자주 편의便宜를 권하면서 간혹 전답을 새로 개척하라고 하기도 하고, 간혹 을 세우라고 권하기도 하며, 또 선박으로 〈물품을〉 운송하라고 하기도 하고, 또 재산을 굴려 이익을 취하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이와 같은 일들을 모두 거절하고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번잡함을 그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년에 다만 동쪽 밭에 작은 정원을 조성한 것은 곡식을 심어 이익을 거두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감상하는 마음을 잠시 붙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 교외의 놀고 있는 넓은 땅에 결국 집을 지은 것은 혹시 관직을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실로 이곳에서 싶었기 때문이다.
등은 기왕에 혼인을 계획해야 하고 또 거처가 필요하지만, 청빈한 우리 집에는 그들을 수용할 곳이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역시 이유가 있다. 이전에 서쪽 땅을 할애하여 선무사宣武寺에 보시했는데, 이미 서쪽 행랑이 없어지자 더 이상 규모가 네모반듯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또한 이곳을 단지 손님이 묵을 방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니, 어찌 화려하게 꾸미겠느냐. 당시 사람들이 이곳을 나의 집이라고 여긴 것이 항상 유감스러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력 있는 부자들이 잇달아 나타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겹겹이 잇닿은 깊숙한 방을 만드니, 그러다 만약 죽어버리면 누구를 위한 집이란 말이냐. 다만 언덕 정도 되는 산을 만들고는 여러 화초를 심어 휴가를 즐김으로써 마음 가는 대로 내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 쓰지 않고 임의로 얽어 세우고, 넓고 큰 규모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가 협소하여 더 이상 방을 만들지 못하였다.
근래에 아들과 손자를 위해 동쪽에 두 채의 집을 지었는데, 이는 십주가 남쪽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재물에 의지하려 한 것이지만, 이미 끌어와도 이르지 않고 또 중도에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교외에 있던 동산을 결국 보존하지 못하고 위암韋黯에게 팔아 백 금을 받아 두 채의 집을 짓는 데에 이미 그 절반을 소비하였다. 동산의 가격으로 얻을 바를 따진다면 어찌 이 정도이겠느냐. 내가 몇 년 동안 경영했기 때문에 대략이나마 이미 완성되었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무성하고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밭두둑이 서로 통하고 도랑과 밭이 서로 이어지며, 화려한 누대와 드높은 정자에는 자못 조망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우뚝 솟은 봉우리와 무성한 초목에는 얽히고설킨 흥취가 없지 않으며, 도랑 속에는 줄풀과 부들이 모두 풍성하고 호수 안에는 마름과 연꽃이 매우 풍부하였다. 비록 인가人家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하지만 도성과 매우 가까우니, 위생韋生(위암)이 원한 것도 평소에 〈이런 곳에〉 흥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뒤미처 서술하는 것은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쓰다 보니 이 일에 대해 언급하게 된 것일 뿐이다. 사영운謝靈運의 〈산가山家〉라는 시의 ‘이 안은 천지의 물건이었는데, 지금은 비루한 자의 소유가 되었구나.[중위천지물中爲天地物 금성비부유今成鄙夫有]’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이 동산을 소유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지금 천지의 물건이 되었으니, 천지의 물건이 나와 더불어 어울릴 시간이 얼마이겠느냐. 이것은 나에게 남은 것이다. 지금 너에게 나누어주니 작은 농가를 지어라. 친속이 이미 많아졌으니, 이치상 역시 이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석씨釋氏(불교)의 가르침에는 재물을 외명外命이라고 하였고, 유가 경전에서도 또한 하였으니, 하물며 일반적인 감정을 지닌 너희들이 어찌 이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 듣자니, 네가 매입한 고숙姑熟의 전지田地는 소금기가 매우 많은 땅이라고 하니, 더더욱 어찌 안심하겠느냐. 공자孔子께서 하셨다. 기왕에 경영한다면 마땅히 성공하도록 하라.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한다면 또한 비웃음거리만 남길 것이다.
만약 수확하는 바가 있으면 네가 스스로 나누어 주도록 해라. 내외內外․존비尊卑․장유長幼의 친속들이 적절하게 얻게 하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또한 역시 응당 여러 딸들에게도 혜택을 주어야 할 것이다. 네가 장손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남의 윗사람이 된 모든 경우는 절대 더 이상 쉽지 않으니, 마땅히 집 안팎으로 화합하여 타인이 흠 잡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타인을 우선하고 자기를 뒤로 해야 귀중해질 수 있으니, 노생老生(노자老子)이 하였다. 만약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더욱 거대한 이익을 불러올 것이니, 너는 마땅히 스스로 힘쓰거라. 소홀히 하여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니, 자신의 이름이 훌륭해지고 나빠지는 것이 어찌 큰일이 아니겠느냐.
오늘 신칙한 바는 이런 의미를 대략이나마 말한 것이다. 정작 집안을 이룬 이후에 재산 증식을 일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했는데, 그 자초지종을 진술함에 부끄러운 마음은 없구나. 아울러 나의 나이가 마침 노년에 접어들어 정신력과 체력이 점차 고갈되어 억지로 공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전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니, 그 가운데 여가를 찾으면 스스로 쉴 수는 있을 것이다. 혹시 겨울철의 햇볕이나 여름철의 그늘 아래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는데, 문건을 처리하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은 채 허름한 관사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연못에 이르러 물고기를 구경하고 숲을 헤치고 들어가 새소리를 들으며 탁주 한 잔에 금琴 한 곡조를 타면서 잠깐이나마 잠시 동안의 즐거움을 찾고 일상생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자 하니 더 이상 집안의 자잘한 일에 수고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구나.
너에게 부여한 일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농사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니, 너도 더 이상 나에게 그에 관한 것을 말하지 말라. 가령 나 이 발생한다 해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만약 〈곡식이〉 곳간에 가득차고 〈금은보화가〉 상자에 가득하면, 〈이것은〉 너의 행운이니, 어떤 경우든 내가 알게 되기를 기다리지 마라. ≪예기≫ 〈중용中庸〉에 ‘효도라는 것은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이다.[효자孝者 선계인지지善繼人之志 선술인지사善述人之事]’ 하였다. 지금 또한 바라건대, 네가 나의 뜻을 온전히 이룬다면 한스러울 바가 없을 것이다.”
注
◦ 이지李贄:〈원주 ②에서 ‘산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말한 바는 무엇인가?
注
◦ ‘필세筆勢’는 어떤 본에는 ‘사의事意’로 되어있다.
注
◦ 이지李贄:〈원주 ②에서 ‘위생韋生(위암)이 원한 것도 평소에 〈이런 곳에〉 흥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견강부회하여 한 말이니, 정말 가짜 도학자이다.
注
◦ 이지李贄:〈원주 ②의 내용은〉 정리情理에 매우 부합하지 않는다.
注
◦ 이지李贄:말한 내용 중에 생계를 꾸려갔다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