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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강주王江州(
왕홍王弘)가
注+① ≪송서宋書≫ 〈왕홍열전王弘列傳〉에 말하였다. “왕홍은 자字가 휴원休元으로,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증조부 왕도王導는 진晉나라 승상丞相을, 조부 왕흡王洽은 중령군中領軍을, 부친 왕순王珣은 사도司徒를 역임하였다. 왕홍은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였고, 청렴과 담백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혼謝混과 사이가 좋았고, 약관의 나이에 회계왕會稽王(사마도자司馬道子)의 표기참군驃騎參軍이 되었다.” 도연명陶淵明과 교제하고 싶었지만 〈그를〉 이르게 할 수 없었다. 도연명이 한번은
여산廬山에 갔는데, 왕강주가 도연명의 벗인
방통지龐通之(
방준龐遵)로 하여금 술상을 준비하여 중도의
율리栗里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도연명은
각질脚疾을 앓고 있어서 문하생 한 명과 아들 두 명으로 하여금
를 들게 하였다. 〈방통지가〉 이른 뒤에 기쁘게 즉시 함께 술을 마셨고, 잠시 뒤에 왕강주가 도착했는데 역시 거스름이 없었다.
注+② 남조南朝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소통蕭統)가 찬술한 〈도연명전陶淵明傳〉에 말하였다. “도연명은 자字가 원량元亮인데, 혹자는 ‘도잠陶潛은 자字가 연명이다.’라고 하였다. 심양潯陽 시상柴桑 사람이다. 증조부 도간陶侃은 진晉나라에서 대사마大司馬를 역임하였다. 도잠은 어릴 때부터 고상한 아취를 지녔고 박학다식하며 출중하였다. 부모님이 연로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는데, 며칠 만에 스스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주州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몸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다가 마침내 이질羸疾(이질, 영양실조)에 걸렸다. 이후에 다시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는데, 가족을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서 부임하면서 아들에게 일꾼 한 명을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이 사람도 역시 남의 자식이니 잘 대우해주어야 한다.’ 하였다. 관직에 있은 지 80여 일이 되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을 파견하여 팽택현에 도착하자, 아전이 ‘응당 정장 차림으로 그를 만나야 합니다.’ 요청했는데, 도잠은 탄식하면서 ‘내가 어찌 〈봉급으로 받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동네의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날로 를 풀어놓고 떠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다. 그의 아내 적씨翟氏도 그와 뜻을 같이 하여 힘든 생활도 편안히 여겨서 남편은 앞에서 밭을 갈고 아내는 뒤에서 잡초를 제거하였다. 도잠은 스스로 선조가 진나라의 재보宰輔(재상宰相)를 역임했다는 이유로 〈본인이〉 다시 후대의 〈조정에〉 몸을 굽히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남조南朝〉 송宋 고조高祖(유유劉裕)의 왕업이 차츰 융성해진 이후로는 더 이상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다. 에 〈조정에서〉 장차 다시 그를 부르려고 했는데 마침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에서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 말하였다. “도잠은 이미 주州의 자사刺史나 군郡의 태수太守를 찾아뵙는 일을 끊어버리고 한번도 〈그들을〉 방문한 적이 없고, 오직 농막에 가거나 여산廬山에 가서 유람할 뿐이었다. 혹 어떤 사람이 술을 마련하여 초대하거나, 혹 그를 초대하여 함께 술집에 가서 앉으면 비록 〈초대해준〉 주인을 〈본래〉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흔쾌히 거스름이 없었다. 자사刺史 왕홍王弘이 〈진晉 공제恭帝〉 원희元熙 연간(419~420)에 강주江州에 부임하고는 도잠을 몹시 흠모했으나, 도잠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왕홍은 매번 사람을 시켜 도잠을 살피게 했는데, 〈도잠이〉 여산에 가게 될 것을 은밀히 알고는 도잠의 벗인 방통지龐通之(방준龐遵)를 보내 술상을 마련하여 도중에서 미리 그를 맞이하게 하니, 곧장 술을 마시고 기뻐하면서 갈 길을 잊었다. 왕홍이 그제야 나타나 서로 통성명을 한 뒤에 온종일 유쾌하게 술을 마셨다.”
단도란檀道鸞의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왕홍이 도연명을 방문했는데 〈도연명에게〉 신발이 없자, 왕홍의 시종이 〈자기〉 신발을 벗어 도연명에게 주었다. 왕홍이 측근에게 팽택현령(도연명)을 위해 신발을 만들어 주라고 하자, 측근이 〈도연명에게〉 신발의 크기를 물었더니 도연명은 즉시 〈예법에 맞지 않는데도〉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다리를 뻗었다. 신발이 도착하자, 〈도연명은 그것을〉 신고 의심하지 않았다.”
에 말하였다. “〈≪진서晉書≫〉 본전本傳에서 언급한 ‘도잠의 벗인 방통지’는, 여기에 이라는 사언시와 뒤의 〈같은 제목의〉 가 있는데, 모두 이웃과의 정다운 우호를 서술한 것이니 확실히 이 사람이다. 또 이라는 시가 있으니, 〈방주부가〉 어찌 바로 방참군이겠는가. ‘중도의 율리栗里’라는 〈말을 보면〉 이는 역시 이사했던 일을 증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