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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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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보(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王瓚之 歷官五兵尙書 未嘗詣一朝貴注+① 南史曰 “瓚之, 王敬弘子也. 官吏部尙書, 諡貞子.” 江湛注+② 南史曰 “江湛, 字徽深, 濟陽考城人. 父夷, 右僕射. 湛居喪以孝聞. 愛文義, 善彈棊鼓琴. 爲彭城王主簿, 司空檀道濟爲子求娶湛妹, 不許. 義康有命, 又不從. 時人重其立志. 所畜牛餓, 御人求草, 湛良久曰 ‘可與飮.’ 在選, 頗有刻覈之譏, 而公平無私, 不受請謁, 論者稱焉.”注+③ 宋書曰 “何偃, 字仲弘, 廬江灊人, 司空尙之中子. 擧秀才, 除中軍參軍, 歷官吏部尙書.” 謂何偃曰
王瓚之 今便是朝隱이라하다


16-29 【왕찬지王瓚之를 지냈는데 한번도 조정의 권세가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注+에 말하였다. “왕찬지王瓚之왕경홍王敬弘의 아들이다.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정자貞子이다.” 강담江湛注+② ≪남사南史≫에 말하였다. “강담江湛휘심徽深으로 제양濟陽 고성考城 사람이며 부친 강이江夷우복야右僕射였다. 강담은 상을 치르면서 효성이 알려졌다. 문장文章을 좋아했고 바둑과 의 연주에 뛰어났다. 팽성왕彭城王(유의강劉義康)의 주부主簿가 되었을 때 사공司空 단도제檀道濟가 아들을 위해 강담의 여동생을 며느리로 맞아들이고자 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고, 유의강劉義康이 명을 내렸는데도 명을 따르지 않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굳은 의지를 높이 샀다. 키우던 소가 굶주려 소몰이꾼이 꼴을 달라고 요구하니, 강담이 한참 있다가 ‘〈소에게〉 마실 것을 주어라.’하였다. 사람을 선발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각박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공평무사하고 청탁을 받지 않았으니, 논자論者들이 칭찬하였다.”注+③ ≪송서宋書≫에 말하였다. “하언何偃중홍仲弘으로 여강廬江 사람이고 사공司空 하상何尙의 둘째 아들이다. 수제로 천거되어 중군참군中軍參軍에 제수되었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하언何偃에게 말했다.
“왕찬지는 요즘 입니다.”


역주
역주1 五兵尙書 : 三國시대 魏나라에서 설치하여 中兵, 外兵, 騎兵, 別兵, 都兵을 관장하게 하였다. 南朝의 宋 등에서도 그대로 썼는데 隋나라에 이르러서 ‘兵部尚書’로 명칭을 바꾸었다.
역주2 ≪南史≫ : 唐나라 李延壽가 지었다. 모두 80권인데 本紀가 10권이고 列傳이 70권이다. 劉宋의 永初 원년(420)부터 南陳의 禎明 3년(589)까지 劉宋․南齊․南梁․陳 네 나라의 170년에 걸친 역사를 기록하였다.
역주3 朝廷의 隱者 : 원문은 ‘朝隱’이다. 벼슬을 하고는 있지만 마치 산속에 있는 은자와 같은 마음과 행동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저잣거리에 숨어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市隱’이라는 말도 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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