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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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禰衡 被魏武謫爲鼓吏러니 正月半試鼓 揚枹하여 爲漁陽어늘 淵淵有金石聲하니 四座 爲之改容注+① 典略曰 “衡, 字正平, 平原般人也.” 文士傳曰 “衡不知先所出, 逸才飄擧. 少與孔融作爾汝之交, 時衡未滿二十, 融已五十. 敬衡才秀, 共結殷勤, 不能相違. 以建安初北游, 融數與武帝牋, 稱其才, 帝傾心欲見. 衡稱疾不肯往, 而數有言論. 帝甚忿之, 以其才名不殺, 圖欲辱之, 乃令錄爲鼓吏. 後至八月朝會, 大閱試鼓節, 作三重閣, 列坐賓客. 以帛絹製衣, 作一岑牟․一單絞及小㡓. 鼓吏度者, 皆當脫其故衣, 着此新衣. 次傳衡, 衡擊鼓爲漁陽摻檛, 蹋地來前, 躡馺脚足, 容態不常. 鼓聲甚悲, 音節殊妙, 坐客莫不忼慨, 知必衡也. 旣度, 不肯易衣, 吏呵之曰 ‘鼓吏, 何獨不易服.’ 衡便止. 當武帝前, 先脫㡓, 次脫餘衣, 裸身而立. 徐徐乃箸岑牟, 次箸單絞, 後乃箸㡓. 畢, 復擊鼓, 摻槌而去, 颜色無怍. 武帝笑謂四坐曰 ‘本欲辱衡, 衡反辱孤.’ 至今有漁陽摻, 自衡造也. 爲黃祖所殺.”이라 孔融
禰衡 罪同胥靡 不能發明王之夢注+② 皇甫謐帝王世紀曰 “武丁夢天賜己賢人, 使百工寫其像, 求諸天下. 見築者胥靡, 衣褐於傅巖之野, 是謂‘傅說’.” 張晏曰 “胥靡, 刑名. 胥, 相也. 靡, 從也. 謂相從坐輕刑也.”이니이다하니
魏武 慚而赦之하다
【頭註】
李云 “北海, 何如人乎?”
劉云 “只如世說自可. 增入脫衣無害, 但覺‘度者’在前, 極是辛苦. 彼鼓吏易衣, 豈必在前邪.”
劉云 “倉卒爲操掩羞, 固當有此.”
李云 “妙妙.”


3-5 예형禰衡 무제武帝(조조曹操)에게 문책을 당해 고리鼓吏가 되었다. 정월正月 보름에 북 치는 것을 시험하였다. 예형이 북채를 들어 를 연주하였는데, 둥둥하고 금석金石같이 굳센 소리가 울리자 주위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때문에 자세를 바로잡았다.注+① ≪전략典略≫에 말하였다. “예형禰衡정평正平이고 평원平原 사람이다.”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예형은 그 선조의 출신을 알 수 없으나 재주는 뛰어나고 언행은 분방하였다. 어려서 공융孔融과 〈서로 편하게〉 ‘너’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때 예형은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고 공융은 이미 쉰 살이었다. 〈공융은〉 예형의 재주가 뛰어난 것을 높이 샀으며, 서로 진심을 다해 사귀었고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못하였다. 건안建安 연간(196~220) 초에 북쪽 지역에 나가 있으면서 공융이 자주 무제武帝(조조曹操)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재주를 칭찬하니, 무제가 마음을 다해 만나고자 하였다. 예형은 병을 핑계대고 가려고 하지는 않고 자주 비판의 말을 하였다. 무제는 이를 심히 분하게 여겼으나 그의 재주와 명성 때문에 죽이지 않고 욕을 보이고자 도모하여 이에 고리鼓吏로 이름을 올리도록 하였다. 뒤에 8월 조회朝會 때에 이르러 크게 북의 절도[고절鼓節]를 점검하였는데 3중의 누각樓閣을 세우고 빈객賓客들을 나열해 앉게 하였다. 비단으로 옷을 제작했는데 잠모岑牟(고각리鼓角吏가 쓰던 모자) 하나와 단교單絞(짙은 황색의 얇은 윗옷) 하나와 작은 홑바지를 만들었다. 고리로서 연주하는 자는 모두 옛옷을 벗고 이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였다. 차례가 예형에게 오자, 예형은 북을 쳐서 〈어양섬과漁陽摻檛〉를 연주했다.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용태容態가 범상치 않았다. 북소리는 매우 비장하고 음절音節은 몹시 오묘하니, 자리에 있던 빈객들은 강개慷慨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틀림없이 예형일 것임을 알았다. 이미 연주를 시작하고 나서도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자, 관리가 꾸짖으며 ‘고리가 어찌하여 혼자만 옷을 갈아입지 않는가?’ 하였다. 예형은 바로 멈추고, 무제의 앞에 서서 먼저 홑바지를 벗고 다음에 나머지 옷을 벗고 알몸으로 섰다. 천천히 잠모를 쓰고 다음으로 단교를 입고 마지막에 홑바지를 입었다. 옷을 다 입자 다시 〈어양참과〉를 치고는 갔는데, 안색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무제가 웃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며 ‘본래 예형을 욕보이려고 했는데 예형이 도리어 나를 욕보였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어양참과〉가 남아 있는데, 예형이 만든 것이다. 나중에 황조黃祖에게 피살되었다.”
공융孔融이 말했다.
注+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말했다. “무정武丁이 하늘이 자신에게 현인賢人을 내려주는 꿈을 꾸고는, 백공百工으로 하여금 그 모습을 그리게 하여 그 사람을 천하에서 찾게 하였다. 담을 쌓는 공사를 하고 있던 부암傅巖의 들판에서 거친 베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으니, 이 사람을 ‘부열傅說’이라고 하였다.”
장안張晏이 말했다. “서미는 형벌의 이름이다. ‘’는 ‘서로[]’라는 뜻이고, ‘’는 ‘따른다[]’는 뜻이니, 상종相從하여 가벼운 형법을 범하는 것을 이른다.”
위 무제가 부끄러워하며 사면해주었다.
예형禰衡예형禰衡
두주頭註
이지李贄북해北海(공융孔融)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유신옹劉辰翁:단지 ≪세설신어世說新語≫의 〈내용과〉 같기만 해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예형이〉 옷을 벗는 내용을 더 넣어도 해될 것은 없지만, 다만 ‘도자度者(연주하는 자)’라는 글자가 앞에 있는 것이 지극히 껄끄럽다. 저 고리鼓吏들이 옷을 갈아입는 내용이 어찌 꼭 〈예형이 옷을 갈아입는 것〉 앞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유진옹劉辰翁:〈공융孔融의 말이〉 창졸간에 조조를 위해 그 부끄러움을 덮어주었으니, 참으로 이 구절이 있어야 마땅하다.
이지李贄:묘하고 묘하다.


역주
역주1 漁陽摻檛 : 漁陽摻撾, 漁陽參撾 또는 漁陽摻 등으로 표기 방식이 다양하다. 古代 북으로 연주하는 樂曲 이름이다. 摻檛는 북의 일종이다. 北周 庾信의 〈夜聽搗衣〉와 唐 李頎의 〈聽安萬善吹觱篥歌〉를 볼 때 〈어양참과〉는 곡명임을 알 수 있다.
역주2 예형은……못했습니다 : 武丁이 꿈을 통해 傅說을 알게 된 일을 빌려와서 禰衡이 비록 사람들로 하여금 낯빛을 바꾸도록 했지만 魏 武帝의 미혹된 마음만은 일깨우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世說講義≫)
역주3 胥靡 : 고대 노역에 복역하던 노예 또는 죄수이다. 형벌의 이름이기도 하다.
역주4 摻檛 : 북을 치는 법을 가리키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異見이 분분하다. ≪後漢書≫ 〈禰衡傳〉에는 ‘摻’자가 ‘參’자로 되어 있고, ‘檛’자는 ‘撾’와 통용한다.
역주5 (槌)[檛] : 저본에는 ‘槌’로 되어 있으나, 宋本 ≪世說新語≫에 의거하여 ‘檛’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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