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예虞預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질현銍縣에 혜산嵇山이 있는데 그 옆에 집을 마련하였기에 성씨로 삼았다.” ≪문장서록文章敍錄≫에 말하였다. “혜강嵇康은 위魏나라 장악정주長樂亭主의 남편으로 낭중郞中이 되었다가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제수되었다.”조경진趙景真(조지趙至)에게注+② 혜소嵇紹의 〈조지서趙至敍〉에 말하였다. “조지趙至는 자字가 경진景眞이고 대군代郡 사람이다. 한말漢末에 그의 선조가 구지현緱氏縣에 흘러들어가 기거하였다. 현령縣令이 새로 부임할 때 조지趙至는 12살로 모친과 함께 길가에서 구경하였다. 모친이 ‘너의 선대는 미천한 가문이 아니었다. 너는 나중에 저렇게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자 조지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었다. 어느 아침 부친이 밭을 갈면서 소를 모는 소리를 듣고는 책을 놓고 울었다. 스승이 물어보자 ‘부귀영화를 이루지 못하여 늙은 부친이 고생을 면치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라고 답하였다. 14살에 태학관太學觀에 들어갔다. 당시 선친先親(혜강嵇康)께서는 태학太學에서 석경石經의 고문古文을 쓰고 계셨다. 일이 끝나고 가려는데 〈조지가〉 마침내 수레를 따라와 선친의 성명을 물었다. 선친이 ‘어린 사람이 무슨 일로 나의 이름을 묻는가?’라고 하자, 조지가 ‘어르신의 풍모가 남다른 것을 보았으므로 여쭐 따름입니다.’라고 하여 선친께서 상세하게 일러주셨다. 조지는
또 몸의 열 몇 군데를 지지기도 하였다. 16세에 마침내 도망하여 곧바로 낙양洛陽에 이르러 선친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업鄴으로 갔다. 패국沛國 사람인 사중화史仲和는 위魏의 영군領軍이었던 사환史渙의 손자인데, 조지는 곧 그에게 의탁하고 마침내 이름을 ‘익翼’으로, 자字를 ‘양화陽和’로 하였다. 선친이 업鄴에 이르자 조지는 태학太學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고는 바로 선친을 따라 산양山陽으로 돌아가 해를 넘겼다. 조지는 신장이 7척尺 3촌寸이며, 〈얼굴은〉 희고 머리카락은 검으며, 입술은 붉고 눈은 또렷하며, 구레나룻과 수염은 많지 않으며, 말과 행동은 느긋하고 세심하며, 몸은 옷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하였다. 선친이 일찍이 그에게 ‘자네는 머리가 작고 〈얼굴은〉 뾰족하며 눈동자는 흑백이 분명하고 시선은 지긋하여 백기白起의 기풍이 있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조지는 논변이 시원하고 유창하여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또한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지 않았다. 맹원기孟元基가 불러서 요동종사遼東從事로 삼았는데, 군郡에 있으면서 많은 옥사獄事를 심리하고 판결하였으며 〈일의 처리가〉 분명하고 합당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부모를 버리고 멀리 돌아다니다가 모친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애통해하다가 피를 토하며 발병했는데, 〈모친의〉 상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말하였다.
권하였다. 왕이 ‘그것을 받으면 진秦나라 군대가 반드시 올 것이고 무안군武安君(백기白起)이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인데, 누가 능히 그를 당하겠는가?’라고 하자, 평원군이 대답하기를 ‘민지澠池의 회맹에서 신이 무안군을 살펴보니, 머리는 작고 얼굴은 뾰족했으며, 눈동자는 흑백이 분병하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작고 얼굴이 뾰족한 자는 과감하게 결단하고, 눈동자의 흑백이 분명한 자는 사태를 명확하게 보고, 시선을 돌리지 않는 자는 의지가 강합니다. 그와 지구전을 펼 수는 있어도 예봉銳鋒을 다투기는 어렵습니다. 염파廉頗는 사람됨이 용맹하고 병사들을 아끼며 어려움을 알고 치욕을 참으니, 그와 더불어 들판에서 싸운다면 당할 수 없겠지만 굳게 지킨다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효성왕이 그 계책을 따랐다.” 몸이 작아 유감스럽네.”
〈해가〉 정남正南 1,000이里에 있으면 구勾가 1자 5치이고, 정북正北 1,000이里에 있으면 구勾가 1자 7치이다.” ‘주비’는 〈≪주비산경周髀算經≫이라는〉 책이다. 1치[촌寸]의 관管으로 〈사계절의〉 왕복往復하는 기氣를 헤아릴 수 있으니,注+⑤ ≪여씨춘추呂氏春秋≫ 〈중하기仲夏紀고악古樂〉에 말하였다. “황제黃帝가 영륜伶倫(황제 때의 악관樂官)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의 서쪽과 곤륜산崑崙山 북쪽에서 해곡嶰谷에서 자라는 대나무 중에서 그 구멍의 두께가 균일한 것을 고르게 하여 두 마디의 사이를 잘라 그것을 불어 황종黃鍾의 관管으로 삼았다. 12개의 통筩을 만들어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듣고 수컷의 울음소리 여섯 가지와 암컷의 울음소리 여섯 가지로 율려律呂를 삼았다.” ≪속한서續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말하였다. “12율律의 변화는 60가지에 이르는데, 율律로 〈사계절의〉 기氣를 알아차린다. 기를 알아차리는 방법은, 방을 3중으로 만들어 문을 닫고 문틈을 막고는 반드시 세밀하게 붉은색 장막을 친다. 나무로 상을 만들어 율律을 그 위에 놓고 갈대의 재로 그 안을 채운다. 기氣에 의하여 움직이면 그 재가 흩어지니, 이것으로 〈기를〉 알아차린다.” 어찌 반드시 커야만 하겠습니까. 단지 식견이 어떠한지 물어야 할 뿐입니다.”
注
【두주頭註】
◦ 유신옹劉辰翁:〈조지趙至가〉 숙야叔夜(혜강嵇康)를 흠모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음 아프고 가련하다. 혜소嵇紹가 그의 분발했던 과정을 꼼꼼하게 서술하였다. 이 어린아이가
◦ 유진옹劉辰翁:〈조경진趙景真이 대답한〉 원래 말의 도량度量이 작고 문채가 지리하니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역주
역주1會稽에서……것이다 :
上虞는 會稽郡의 屬縣이다. 선대가 살았던 회계의 ‘稽’자와 嵇山의 ‘嵇’자의 발음이 같으므로 이것을 성씨로 삼고, 원래의 성인 ‘奚’씨를 잊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의 발음으로는 ‘稽’는 ‘계’, ‘嵇’는 ‘혜’이나 중국어로는 모두 ‘ji’로 발음이 같다.
역주215세가……하고 :
≪晉書≫ 〈文苑傳〉에 趙至가 멀리 유학을 가고자 하였는데 모친이 하지 못하게 하자 마침내 미친 척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3嚴尤의 ≪三將敍≫ :
≪舊唐書≫ 〈經籍志〉, ≪新唐書≫ 〈藝文志〉, ≪通志≫ 등에는 ≪三將軍論≫ 1권이 있다고 하였다. ≪三將論≫이라고도 한다.
역주4馮亭을 받아들이라고 :
풍정은 전국시대 韓나라 上黨太守였다. B.C. 262년 秦나라 白起가 韓나라를 정벌하여 野王縣을 함락시키자 上黨의 도로가 두절되었다. 풍정은 趙나라와 협력하여 秦나라에 대적하고자 조나라에 상당을 바치겠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