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爲王敦所歎
注+① 虞預晉書曰 “逖, 字士, 范陽遒人. 豁蕩不修儀檢, 輕財好施.” 晉陽秋曰 “逖與司空劉琨, 俱以雄豪著名. 年二十四與琨同辟司州主簿, 情好綢繆, 共被而寢. 中夜聞鷄嗚, 俱起曰 ‘此非惡聲也.’ 每語世事, 則中宵起坐, 相謂曰 ‘若四海鼎沸, 豪傑共起, 吾與足下, 相避中原耳.’ 爲汝南太守, 值京師傾覆, 率流民數百家, 南渡行, 達泗口, 安東爲徐州刺史. 逖旣有豪才, 常忼慨, 以中原爲己任, 乃說中宗雪復神州之計, 拜爲豫州刺史, 使自招募. 逖遂率部曲百餘家, 北渡江, 誓曰 ‘祖逖若不淸中原而復濟此者, 有如大江.’ 攻城略地, 招懷義士, 屢摧石虎, 虎不敢復闚河南. 石勒爲逖母墓, 置守吏. 劉琨與親舊書曰 ‘吾枕戈待旦, 志梟逆虜, 常恐祖生先吾著鞭耳.’ 會其病卒. 先有妖星見豫 逖曰 ‘此必爲我也. 天未欲滅寇故耳.’ 贈車騎將軍.”이라하다
15-43 유곤劉琨이 조차기祖車騎(조적祖逖)의 명민하고 통달함을 칭찬하여 말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
왕돈王敦이 탄복한 사람이다.”
注+① 우예虞預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조적祖逖은 자字가 사치士稚이고, 범양范陽 주遒 사람이다. 통이 크고 활달하여 예의를 차리지 않았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아 베풀기를 좋아했다.”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조적과 사공司空 유곤劉琨은 모두 영웅호걸로 이름났다. 조적은 24세 때 유곤과 같이 사주司州 주부主簿로 초빙되었는데, 우정이 돈독하고 끈끈하여 한 이불을 덮고 잤다. 한밤중에 닭 울음 소리를 듣고 같이 일어나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세상일을 말할 때마다 밤중에 일어나 앉아 서로 말하기를, ‘만약 사해四海가 들끓어 호걸이 모두 일어난다면 나와 그대는 서로 중원을 피해야 하네.’라고 하였다.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있을 때 경사京師(낙양)가 함락되자 유민流民 수백 가家를 이끌고 남쪽으로 건너가 사수泗水 입구에 도달하였는데, 안동장군安東將軍(사마예司馬睿)이 서주자사徐州刺史에 임명하였다. 조적은 전부터 호걸의 능력을 지녀서 항상 분개하며 중원〈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마침내 중종中宗(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에게 신주神州를 탈환하여 수복할 계획에 대해 말하니, 〈중종이〉 그를 예주자사豫州刺史에 제수하여 스스로 〈병사를〉 모집할 수 있게 하였다. 조적이 마침내 백여 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강을 건너며 맹세하기를, ‘이 큰 강을 두고 맹세하노니, 조적은 중원을 소탕하지 않고는 다시 이곳을 건너지 않으리라.’ 하였다. 성城을 공격하고 땅을 정복하면서 의사義士를 불러들여 여러 번 를 꺾으니, 석호가 더 이상 감히 하남河南 지역을 넘보지 못하였다. 석륵石勒은 조적의 모친의 묘를 지키는 관리를 두었다. 유곤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창을 베고 〈누워〉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며 역적 오랑캐를 효수할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항상 조생祖生(조적)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휘두를까 두렵네.’라고 하였다. 조적은 병이 들어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요성妖星이 예주豫州 방면에 나타나자 조적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나 때문이다. 하늘이 아직은 적을 멸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