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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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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南郡 既破殷荊州 收殷將佐十許人한대 諮議羅企生 亦在焉注+① 玄別傳曰 “玄克荊州, 殺殷道護及仲堪參軍羅企生․鮑季禮, 皆仲堪所親仗也.”하다 素待企生厚하여 將有所戮 先遣人語云 若謝我 當釋罪하리라하니 企生答曰
爲殷荊州吏하니 今荊州奔亡하여 存亡未判이어늘 我何顏謝桓公注+② 中興書曰 “企生, 字宗伯, 豫章人. 殷仲堪初請爲府功曹, 桓玄來攻, 轉咨議參軍. 仲堪多疑少決, 企生深憂之, 謂其弟遵生曰 ‘殷侯, 仁而無斷, 事必無成. 成敗天也, 吾當死生以之.’ 及仲堪走, 文武並無送者, 唯企生從焉. 路經家門, 遵生紿之曰 ‘作如此分別, 何可不執手?’ 企生回馬授手. 遵生便牽下之, 謂曰 ‘家有老母, 將欲何行?’ 企生揮泣曰 ‘今日之事, 我必死之, 汝等奉養, 不失子道. 一門之內, 有忠與孝, 亦復何恨?’ 遵生抱之愈急. 仲堪於路待之, 企生遙呼曰 ‘今日死生是同, 願少見待.’ 仲堪見其無脫理, 策馬而去. 俄而玄至, 人士悉詣玄, 企生獨不往而營理仲堪家. 或謂曰 ‘玄, 性猜急, 未能取卿誠節. 若遂不詣, 禍必至矣.’ 企生正色曰 ‘我, 殷侯吏, 見遇以國士. 不能共殄醜逆, 致此奔敗, 何面目就桓求生乎?’ 玄聞, 怒而收之, 謂曰 ‘相遇如此, 何以見負?’ 企生日 ‘使君口血未乾, 而生此奸計, 自傷力劣, 不能剪定凶逆, 我死恨晚爾.’ 玄遂斬之. 時年三十有七, 衆咸悼之.”하리잇가하다
旣出市 桓又遣人하여 問欲何言하니 答曰
昔晉文王 殺嵇康注+③ 別見.이나 而嵇紹 爲晉忠臣注+④ 王隱晉書曰 “紹, 字延祖, 父康. 紹十歲而孤, 事母孝謹. 累遷散騎常侍. 惠帝敗於蕩陰, 百官左右皆奔散, 唯紹儼然端冕, 以身衛帝, 兵交御輦, 飛箭雨集, 遂以見害.”이니이다 從公乞一弟하여 以養老母하노이다하니
亦如言宥之하다
先曾以一羔裘 與企生母胡한대 時在豫章이라가 企生問至하고 即日焚裘하다
【頭註】
李云 “好話好話.”
王云 “恨哉! 此母亦以足傳.”


1-51 환남군桓南郡(환현桓玄)이 은형주殷荊州(은중감殷仲堪)를 격파하고 난 뒤 은중감의 장수와 보좌 10여 인을 잡았는데 자의참군咨議參軍 나기생羅企生도 거기에 끼어있었다.注+① 〈환현별전桓玄別傳〉에 “환현桓玄형주荊州를 이기고 은도호殷道護와, 은중감殷仲堪의 참군 나기생羅企生포계례鮑季禮를 죽였으니 모두 은중감이 가까이하고 의지했던 사람들이다.” 하였다. 환현은 평소 나기생을 후대하였으므로 죽여야 할 때가 되자 먼저 사람을 보내 “만약 나에게 사죄한다면 죄를 면해줄 것이다.” 하니 나기생이 답하였다.
혜강嵇康혜강嵇康
“나는 은형주의 관리로서 지금 은형주는 도망하여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데 내가 무슨 면목으로 환공桓公에게 사죄하겠습니까.”注+②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나기생羅企生종백宗伯이고 예장豫章 사람이다. 은중감殷仲堪이 처음에 초청하여 공조功曹가 되었다. 환현桓玄이 공격해왔을 때 자의참군咨議參軍으로 옮겼다. 은중감이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나기생이 매우 걱정하며 그 아우 나준생羅遵生에게 ‘은후殷侯(은중감)는 인자하나 결단력이 없어 일이 필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성패는 하늘에 달렸으니 나는 생사를 걸고 가겠다.’ 하였다. 은중감이 도주하게 되었을 때 문관文官무관武官 중에 아무도 그를 전송하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나기생만 그를 따랐다. 가는 길에 자신의 집 문을 지나게 되었는데 나준생이 그를 속여 ‘이와 같이 이별하게 되었는데 어찌 손을 잡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니, 나기생이 말을 되돌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나준생이 손을 잡아당겨 말에서 내리게 하고는 ‘집에 노모가 계신데 어디를 가려고 하십니까?’ 하였다. 나기생이 뿌리치며 울면서 ‘오늘의 일로 나는 필시 죽게 될 것이니, 너희는 모친을 잘 봉양하여 자식의 도리를 잃지 말라. 한 집안 안에서 충신과 효자가 있게 된다면 또한 더 이상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니 나준생이 더욱 절박하게 그를 껴안았다. 은중감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자 나기생이 멀리서 소리치기를 ‘오늘 생사를 같이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하였다. 은중감이 그가 이탈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갔다. 얼마 후 환현이 이르러 인사들이 모두 환현에게 나아갔는데 나기생만 유독 가지 않고 은중감의 집을 관리하였다. 어떤 이가 ‘환현은 성품이 의심이 많고 조급하여 경의 변치 않는 충절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끝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화가 반드시 미칠 것이오.’ 하니, 나기생이 정색하고 말하였다. ‘나는 은후의 관리로서 국사國士로 대접받았소. 추악한 역적을 같이 죽일 수 없어 이렇게 달아나 패하게 되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환현에게 나아가 살려달라 하겠소?’ 하였다. 환현이 듣고 노하여 그를 잡아다 ‘이와 같이 대접해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등을 돌리는가?’ 하니 나기생이 말하였다. 이렇게 간사한 꾀를 내었으니 나 자신이 무력하여 흉악한 역적을 처벌할 수 없어 마음 아프고 나의 죽음이 늦은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환현이 마침내 그를 베었다. 죽을 때의 나이가 37세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도하였다.”
〈처형되려고〉 저자에 나간 뒤에 환현이 다시 사람을 보내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나기생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문왕文王(사마소司馬昭)이 혜강嵇康을 죽였으나注+③ 〈혜강嵇康에 대해서는〉 따로 보인다. 〈그의 아들인〉 혜소嵇紹나라의 충신이 되었습니다.注+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혜소嵇紹연조延祖이고, 부친은 혜강嵇康이다. 혜소는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효성스럽고 정성스레 섬겼다. 여러 번 승진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혜제惠帝탕음蕩陰에서 패배하자 백관과 좌우의 신하가 모두 달아나 흩어졌는데, 오직 혜소가 비장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자신의 몸으로 황제를 호위하다가 황제의 수레에 무기가 교차하고 날아드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서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공께서는 부디 제 아우 하나를 살려주어 노모를 봉양하게 해주소서.”
환현이 또한 그 말대로 〈아우 하나를〉 사면해주었다.
환현이 그 전에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갖옷 하나를 나기생의 모친 호씨胡氏에게 준 적이 있었다. 호씨가 당시 예장豫章에 있다가 나기생의 부고訃告를 듣고는 그날로 갖옷을 불태웠다.
혜소嵇紹혜소嵇紹
두주頭註
이지李贄:좋은 말이로다, 좋은 말이로다.
왕세무王世懋:한스럽다. 이 모친 역시 〈후세에〉 전할 만하다.


역주
역주1 使君(환현)은……전에 : 殷仲堪과 楊佺期 등은 尋陽에서 동맹을 맺었는데 그때 환현이 盟主였다. 동맹을 맺을 때는 희생을 죽여 피를 마시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世說箋本≫)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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