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鑿齒는 史才不常하여 宣武甚器之하니 未三十에 便用爲荊州治中이라 鑿齒謝牋에 亦云
從此忤旨
하여 出爲衡陽郡
하니 性理遂錯
이라 於病中
에 猶作漢晉春秋
한대 品評卓逸
注+① 續晉陽秋曰 “鑿齒少而博學, 才情秀逸, 溫甚奇之, 自州從事, 歲中三轉至治中. 後以忤旨, 左遷戶曹參軍․衡陽太守. 在郡著漢晉春秋, 斥溫覬覦之心也.” 鑿齒集載其論, 略曰 “靜漢末累世之交爭, 廓九域之蒙晦, 大定千載之盛功者, 皆司馬氏也. 若以魏有代王之德, 則不足, 有靜亂之功, 則孫․劉鼎立, 共․秦政, 猶不見敍於帝王, 況暫制數州之衆哉? 且漢有係周之業, 則晉無所承魏之迹矣. 春秋之時, 吳․楚稱王, 若推有德, 彼必自係於周, 不推吳․楚也. 況長轡廟堂, 吳․蜀兩定, 天下之功也?”이라
9-4
습착치習鑿齒는
사학史學의 재능이 비범하였다.
환선무桓宣武(
환온桓溫)가 그 점을 매우 중시하여 30세가 되기도 전에 곧장
형주荊州의
으로 기용되었다. 습착치도
사전문謝牋文(감사의 글)에서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명공明公(환선무)을 만나지 못했다면
형주荊州에서 〈미관말직인〉
로
치사致仕할 뻔했습니다.”
이후에 〈습착치가〉 도성인 건강建康(남경南京)에 이르러 간문제簡文帝(사마욱司馬昱)를 뵙고 돌아와 복명하니, 환선무가 물었다.
“평생 한 번도 이런 〈훌륭한〉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찬탈의 뜻을 품고 있던〉 환선무의 뜻에 거슬려 지방으로 좌천되어
형양군衡陽郡의 태수가 되니 정신착란증에 걸렸다. 와병 중에도 ≪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지었는데 〈인물에 대한〉 품평이 탁월하였다.
注+① 단도란檀道鸞의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습착치習鑿齒는 젊을 때부터 박학다식하고 재정才情(재주와 사고력)이 뛰어났으니, 환온桓溫이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형주荊州의 종사從事 신분으로부터 한 해 동안 3번 승진하여 치중治中에 이르렀다. 이후에 〈환온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어 호조참군戶曹參軍과 형양태수衡陽太守가 되었다. 형양군에 있을 때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지어 환온의 찬탈하려는 마음을 지적하였다.”
≪습착치집習鑿齒集≫에 그 글을 싣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漢나라 말기의 여러 세대에 걸친 교전을 종식시키고 구역九域(구주九州)에 깔린 어둠을 말끔히 걷어내어 천년의 훌륭한 공적을 크게 확정한 것은 모두 사마씨司馬氏(진晉나라)이다. 만약 위魏(삼국三國)나라에 왕자王者를 대신할 덕이 있었다고 해도 〈왕자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고, 혼란을 종식시킨 공적이 있었다고 해도 〈완벽히 통일하지 못하여〉 〈오吳(삼국)나라의〉 손씨孫氏(손권孫權)와 〈촉蜀(삼국)나라의〉 유씨劉氏(유비劉備)와 정립하였다. 와 진秦나라의 영정嬴政(진秦 시황始皇)조차도 제왕으로 기록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몇몇 주州의 백성을 잠시 제압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한나라에는 주周나라를 계승한 업적이 있는데, 진나라에는 위나라를 계승한 자취가 없다. 춘추春秋시대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참람되게〉 천왕天王을 자칭했으나, 만약 덕을 지닌 자를 추숭한다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스스로 주나라를 계승했다고 하고 오나라와 초나라를 왕으로 추숭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마씨의 진나라가〉 조정에서 강력히 천하를 다스리고 오나라와 촉나라 양국을 평정한 것은 천하의 공적임에랴.”
注
◦ 유진옹劉辰翁:〈본문의 사재부상史才不常의〉 ‘불상不常’은 바로 ‘비범하다’는 뜻이다.
注
◦ 유신옹劉辰翁:간웅姦雄(환온桓溫)에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은 본래 어렵다. 그러나 역시 어찌 정신착란증에 걸리는 지경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