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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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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魏公 駐兵延安한대 忽夜有人携匕首하여 至臥內 魏公起하여
是誰아하니
某來殺諫議注+① 韓忠獻家傳曰 “公, 諱琦, 字穉圭, 相州人. 天聖五年, 進士第二, 方唱名, 太史奏日下雲見. 後相英․神兩朝, 贈魏國忠獻王.”니이다하다
又問
誰遣汝아하니
張相公注+② 夏國, 方張元用事也.이니이다하다
魏公 復就枕하고
取我首去하라하니
其人曰
某不忍하니 得諫議金帶 足矣니이다하고
遂取帶去하고 魏公 亦不治此事注+③ 宋史曰 “趙元昊反, 琦適自蜀歸, 論西師形勢甚悉, 卽命爲陝西安撫使. 琦與仲淹在兵間久, 人心歸之. 朝廷倚以爲重, 天下稱爲韓․范.”


13-31 【한위공韓魏公(한기韓琦)이 연안延安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밤에 어떤 사람이 비수를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오자, 한위공이 일어나 물었다.
“누구냐?”
한기韓琦한기韓琦
〈그가 말하였다.〉
“저는 간의대부諫議大夫(한기)를 죽이러 왔습니다.”注+① ≪한충헌가전韓忠獻家傳≫에 말하였다. “한위공韓魏公, 치규穉圭로, 상주相州 사람이다. 〈 인종仁宗천성天聖 5년(1027)에 진사進士 제2등으로 합격했는데, 〈합격자 이름을 부를 때〉 막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태사太史가 태양 아래에 〈오색 빛깔의〉 구름이 나타났다고 아뢰었다. 이후에 영종英宗신종神宗 두 조정에서 재상을 역임하였고, 〈세상을 떠난 뒤에〉
〈한위공이〉 또 물었다.
“누가 너를 보냈는가?”
〈그가 말하였다.〉
입니다”注+서하국西夏國은 〈당시에〉 한창 장원張元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한위공이 다시 베개를 베고는 말하였다.
“나의 머리를 〈베어〉 가져가거라.”
그 사람이 말하였다.
“저는 차마 할 수 없으니, 간의대부의 금대金帶만 얻으면 충분합니다.”
마침내 금대를 가지고 떠났고, 한위공도 이 일에 관해서 징벌하지 않았다.注+③ ≪송사宋史≫ 〈한기열전韓琦列傳〉에 말하였다. “〈서평왕西平王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기가 마침 에서 돌아와 서쪽 군대의 형세를 매우 자세히 논의하니 즉시 섬서안무사陝西安撫使에 임명하였다. 한기가 과 함께 병영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인심이 그들에게 귀의하였다. 조정에서 〈그들에게〉 의지하면서 중시하니 천하 사람들이 한범韓范(한기와 범중엄)이라고 일컬었다.”


역주
역주1 魏國忠獻王에 추증되었다 : 宋 神宗 熙寧 8년(1075)에 韓琦가 세상을 떠나자, ‘충헌’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徽宗 때에 魏郡王에 추증되었다.
역주2 張相公(張元) : 宋나라 華州 사람으로, 殿試에 응시하여 누차 떨어지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西夏國의 초대 황제 趙元昊(李曩霄의 改名)에게 투항하여 중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역주3 趙元昊 : 1003~1048. 西夏國 초대 황제 李曩霄로, 宋나라에서 趙氏로 賜姓하였다. 宋 仁宗 明道 연간(1032~1033) 초반에 서하의 왕위를 세습하고, 顯道란 연호를 쓰고 寶元 연간(1038~1039) 초반에 天授란 연호를 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송나라와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망과 부상자가 많아 화의를 애걸하여 夏國主로 봉해져서 그대로 황제 노릇을 하였다.
역주4 范仲淹 : 989~1052. 蘇州 吳縣 사람으로, 字는 希文이다. 宋나라 興化縣令․祕閣校理․陳州通判 등을 역임했고, 仁宗 康定 元年(1040)에 韓琦와 함께 陕西經略安撫招討副使가 되었으며, 參知政事가 되어 개혁해야 할 정치상의 10개 조를 상소하였으나 반대파 때문에 실패하였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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