刁玄亮之
이요 戴若思之巖巖
注+① 虞預晉書曰 “戴儼, 字若思, 廣陵人. 才義辯濟, 有風標鋒穎. 累遷征西將軍, 爲王敦所害. 贈左光祿大夫ㆍ”이요 卞望之之
注+② 卞壺別傳曰 “壺, 字望之, 濟陰寃句人. 父粹, 太常卿. 壺少以見稱. 累遷御史中丞, 權門屛迹. 轉領軍尙書令, 蘇峻作亂, 率衆距戰, 父子二人俱死王難.” 鄧粲晉紀曰 “初咸和中能談嘲者, 慕王平子謝幼輿等爲達, 壺厲色於朝曰 ‘悖禮傷教, 罪莫斯甚. 中朝傾覆, 實由於此.’ 欲奏治之, 王導ㆍ庾亮不從乃止. 其後皆爲名士.” 語林曰 “孔坦爲侍中, 密啓成帝, 不宜往拜曹夫人. 丞相聞之曰 ‘王茂弘駑痾耳. 若卞望之之巖巖, 刁玄亮之察察, 戴若思之峯距, 當敢爾不?’ 此言殊有由緖, 故聊載之耳.”로다라하다
15-55 왕승상王丞相(왕도王導)이 말하였다.
“조용하고 깨끗한
조현량刁玄亮(
조협刁協)이요, 위엄 있고 빼어난
대약사戴若思(
대엄戴儼)요,
注+① 우예虞預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대엄戴儼은 자字가 약사若思이고, 광릉廣陵 사람이다. 변론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고 일처리를 잘하였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운 풍도를 지녔다. 여러 번 승진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이르렀는데, 왕돈王敦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ㆍ의동삼사儀同三司에 추증되었다.” 정제되고 엄격한
변망지卞望之(
변호卞壺)로다.”
注+② 〈변호별전卞壺別傳〉에 말하였다. “변호卞壺는 자字가 망지望之이고, 제음濟陰 원구寃句 사람이다. 부친 변수卞粹는 태상경太常卿이었다. 변호는 젊었을 때 간귀簡貴하고 청정淸正한 것으로 칭송받았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어사중승에 이르렀을 때는 권세가가 행동을 조심하였다. 영군領軍ㆍ상서령尙書令으로 옮겼을 때 소준蘇峻이 난을 일으키자 무리를 이끌고 항전하다가 부자父子 두 사람 모두 전사戰死하였다.”
등찬鄧粲의 ≪진기晉紀≫에 말하였다. “처음에 함화咸和(326~334) 연간에 귀한 집 자제로서 한가로이 지내며 담론과 냉소로 소일하는 자들이 왕평자王平子(왕징王澄)와 사유여謝幼輿(사곤謝鯤) 등을 통달하였다고 여겨 사모하자, 변호가 조정에서 얼굴색을 엄하게 하고 말하기를, ‘〈이들은〉 예교禮敎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죄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중조中朝(서진西晉)가 망한 것은 실로 여기에 기인하였습니다.’라고 하고 황제에게 상주하여 처벌하려고 하였으나 왕도王導와 유량庾亮 등이 따르지 않아 중지되었다. 그 후에 〈이들은〉 모두 처신을 바르게 고쳐 명사名士가 되었다.”
≪어림語林≫에 말하였다. “공탄孔坦은 시중侍中이었을 때 진晉 성제成帝(사마연司馬衍)에게 몰래 아뢰어 에게 가서 절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승상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 왕무홍王茂弘(왕도王導)은 무능하고 유약할 뿐이로구나. 만약 위엄 있고 빼어난 변망지卞望之(변호卞壺)나 조용하고 깨끗한 조현량刁玄亮(조협刁協)이나 정제되고 엄격한 대약사戴若思(대엄戴儼) 같은 사람이었다면 감히 이렇게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은 특별히 유래가 있기 때문에 실었을 뿐이다.
注
◦ ‘거距’는 ≪진서晉書≫에 ‘거岠’로 되어 있다.
注
◦ 왕세무王世懋:이것은 주註가 있어야 비로소 분명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