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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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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道林 還東注+① 高逸沙門傳曰 “遁爲哀帝所迎, 游京邑久, 心在故山, 乃拂衣王都, 還就巖穴.”할새 時賢 竝送於征虜亭注+② 丹陽記曰 “太安中, 征虜將軍謝安立此亭, 因以爲名.”한대 蔡子叔 前至하여 坐近林公注+③ 中興書曰 “蔡系, 字子叔, 濟陽人, 司徒謨第二子. 有文理, 仕至撫軍長史.”하고 謝萬石 後來하여 坐小遠이라 暫起 移就其處한대
蔡還하여 見謝在焉하고 因合褥擧謝擲地하고 自復坐 冠幘傾脫이어늘 乃徐起하여 振衣就席한대 神意甚平하여 不覺瞋沮 坐定하고 謂蔡曰
奇人이니 殆壞我面이라하니
蔡答曰
我本不爲卿面作計라하고
其後 二人俱不介意
【頭註】
劉云 “送一僧, 何至爭近? 至此, 子叔, 小人, 語更深狠.”


13-10 이 동쪽으로 돌아갈 때,注+축법제竺法濟의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에 말하였다. “지둔支遁애제哀帝(사마비司馬丕)에게 영접 받아 도성에서 오래 머물렀으나, 마음은 옛 산(동산東山)에 있었기 때문에 곧 도성을 떠나 다시 암혈巖穴(산중山中)로 갔다.” 당시의 현자들이 모두 에서 전송하였다.注+산겸지山謙之의 ≪단양기丹陽記≫에 말하였다.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안謝安이 이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채자숙蔡子叔(채계蔡系)은 먼저 도착하여 임공(지도림) 가까이 앉았고,注+하법성何法盛의 ≪진중흥서晉中興書≫에 말하였다. “채계蔡系자숙子叔으로, 제양濟陽 사람이고, 사도司徒 채모蔡謨의 둘째 아들이다. 문리文理(예의禮儀)를 지녔고, 관직이 무군장사撫軍長史에 이르렀다.” 사만석謝萬石(사만謝萬)은 나중에 와서 〈임공의 자리로부터〉 조금 멀리 앉았다. 채자숙이 잠시 일어나 〈자리를 비우자〉 사만석이 〈채자숙의〉 자리로 옮겨 갔다.
채자숙이 돌아와서 사만석이 〈자신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는 방석 째로 사만석을 들어서 땅에 내던지고 스스로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사만석은 모자가 벗겨지고 두건이 비뚤어졌으나 곧바로 천천히 일어나 옷을 털고 자리로 갔는데, 마음이 매우 평온하여 성을 내거나 낙담하지도 않았다. 〈사만석이〉 좌정한 뒤에 채자숙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상한 사람이니, 거의 내 얼굴을 망가뜨릴 뻔 했소.”
채자숙이 대답하였다.
“나는 본래 그대의 얼굴에 대해 계획한 것이 아니었소.”
이후에 두 사람은 모두 이 일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두주頭註
유신옹劉辰翁:승려 한 명을 전송하는데 어찌 〈그와〉 가까운 자리를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고, 채자숙蔡子叔(채계蔡系)은 소인배라서 말이 또 매우 패려궂었다.


역주
역주1 支道林(支遁) : 314~366. 陳留 사람으로, 字는 道林이며, 세상에서 支公ㆍ林公ㆍ支硎이라고 불렀다. 혹은 河東 林慮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高僧이자 문학가이다.
역주2 征虜亭 : 원래 石頭城 안에 있었는데, 현재는 南京市 鼓樓區 国防園 서남쪽 明城墻 안에 있다. 淸나라 道光의 ≪金陵覽勝詩考≫에 “정로정은 정로장군 謝安이 이곳에 머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석두성 안에 있고, 西晉시대 太元 연간(376~396)에 창건했다.[征虜亭 征虜將軍謝安嘗止此 故名 在石頭塢 晉太元中創]” 하였다.
역주3 太安 연간 : ‘태안’은 晉 惠帝(司馬衷)가 302~303년에 사용한 연호이다. ≪太平御覽≫ 〈居處部亭〉에 인용된 ≪丹陽記≫에는 “謝石이 정로정을 창건했다.……太元 연간(376~396)이다.[謝石創征虜亭……太元中]” 하였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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