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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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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天朝 宰相楊再思 晨入朝할새 値一重車한대 將牽出西門이로되 道滑하여 牛不前하니 馭者罵曰
一群癡宰相 不能和得陰陽하여 而令我匯行하니 如此辛苦注+① 時旱澇, 輒閉坊市南門, 以禳之.로다하다
再思 徐謂之曰
爾牛亦自弱하니 不得嗔他宰相注+② 劉昫唐書曰 “再思, 鄭州原武人. 證聖初, 鳳閣侍郞. 巧佞邪媚, 能得人主微旨, 恭愼畏忌, 未嘗忤物. 或曰 ‘公名高位重, 何爲屈折如此?’ 再思曰 ‘世路艱難, 直者受禍, 苟不如此, 何以全身?’”注+③ 是是.이라하다


13-28 【 시대에 재상인 양재사楊再思가 새벽에 조정에 들어갈 때 한 대를 만났다. 〈수레를 모는 자가〉 한창 〈소를〉 끌어당기면서 서문西門을 나서려고 하는데 길이 미끄러워 소가 나아가지 못하자, 수레를 모는 자가 〈이렇게〉 욕을 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측천무후則天武后
“한 떼의 어리석은 재상들이 〈시장의 남문을 폐쇄하여〉 나로 하여금 〈서문으로〉 돌아가게 하여 이처럼 생고생을 하는구나.”注+①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는 가뭄이 들거나 장마가 지면 그때마다 시장의 남문을 폐쇄하고 푸닥거리를 하였다.
양재사가 천천히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소가 또한 본래 허약하니, 다른 재상들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注+의 ≪구당서舊唐書≫ 〈양재사열전楊再思列傳〉에 말하였다. “양재사는 정주鄭州 원무原武 사람이다. 〈 측천무후則天武后증성證聖 연간(695) 초반에 봉각시랑鳳閣侍郞(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다. 〈그는〉 교활하고 간사하며 아첨하여 군주의 은미한 뜻을 잘 알아차릴 수 있었고, 공손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여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혹자가 ‘공께서는 높은 명성이 크고 지위가 막중한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스스로를 굽히십니까?’ 하자, 양재사가 ‘세상길이 험난하여 올곧은 자는 재앙을 받으니, 만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몸을 보전하겠는가?’”注+③ 옳고 또 옳다.


역주
역주1 則天武后(측천무후) : 624~705. 幷州 文水 사람으로, 荆州都督 武士彠(무사확)의 둘째 딸이다. 14세에 후궁으로 들어가 唐 太宗의 才人으로 있으면서 武媚라는 호칭을 받았고, 高宗의 황후가 되면서 전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이 죽자 中宗을 세웠다가 폐위하고 그 아우 睿宗을 세웠는데, 결국에는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帝位에 올라 측천황제라 하고 국호를 周로 바꿨다. 제위 16년 만에 중종이 復位하면서 폐위되었다.
역주2 重車 : 생활에 필요한 용구를 싣는 수레, 또는 군수품을 운송하는 兵車이다.
역주3 陰陽을……못하여 : 가뭄이 들거나 장마가 진 것을 이른다.
역주4 劉昫(유후) : 887~946. 涿州 歸義 사람으로, 字는 耀遠이다. 後唐 庄宗 때에 太常博士․翰林學士를, 明宗 때에 兵部侍郞․端明殿學士․中書侍郞․刑部尚书․同中書門下平章事를, 廢帝 때에 吏部尙書․門下侍郎을 역임하고, ≪唐書≫를 감수했는데 南宋시대 이후에는 이를 ≪舊唐書≫라고 불렀다. 後晉 高祖 때에 東都留守․判鹽鐵․司空․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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