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帝廢立之際
注+① 明帝紀曰 “廢帝子業疑畏諸父, 拘之殿內, 遇上無禮, 將加害, 上先與阮佃夫李道兒等密謀, 殞之後堂.”에 王思遠
注+② 南史曰 “王思遠, 晏從父弟也. 父羅雲平西長史, 思遠八歲, 父卒. 祖弘之及外祖羊敬元, 竝棲退高尙, 故思遠少無仕心. 宋建平王景素, 辟主簿, 深見禮遇. 後至司徒․左長史.”이 謂從兄晏曰
兄은 荷武帝厚恩이어늘 今一旦賛人하니 如此事彼면 或可以權計相須나 未知兄將何以自立이라 及此引決이면 猶可保全門户하고 不失後名이라하니
隆昌之末에 阿戎勸我自裁한대 若用其語인댄 豈有今日이리오하니
如阿戎所見
은 猶未晚也
注+③ 阿戎, 思遠小字.라하다
旬日晏及禍
注+④ 書曰 “晏, 字休黙, 一字士彦. 武帝時爲丹陽尹, 位任親重. 明帝謀廢立, 晏便響應, 帝雖以事際須晏, 而心相疑斥. 晏無防意, 居朝事多專決, 數呼相工自視, 云當大貴, 與客語好屛人. 帝疑晏反, 乃密計召晏於華林省, 誅之.”하다
14-29 【
보補】
제齊 명제明帝(
소란蕭鸞)가 〈
무제武帝를〉 폐위시키려 할 때
注+① 에 말하였다. “폐제廢帝 유자업劉子業은 여러 숙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전내殿內에 구금하였으며 주상(명제明帝)을 만나도 무례하게 대하여 장차 해치려 하였으므로, 주상이 먼저 완전부阮佃夫ㆍ이도아李道兒 등과 몰래 모의하여 후당後堂에서 죽였다.” 왕사원王思遠이
注+② ≪남사南史≫ 〈왕사원전王思遠傳〉에 말하였다. “왕사원王思遠은 왕안王晏의 사촌동생이었다. 부친 왕라운王羅雲은 평서장사平西長史였는데, 왕사원이 8세 때 죽었다. 조부 왕홍지王弘之와 외조부 양경원羊敬元(양흔羊欣)은 모두 은거하여 살고 고상高尙하였기 때문에 왕사원은 조금도 벼슬할 마음이 없었다. 송宋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가 주부主簿로 초빙하여 깊이 예우하였다. 후에 사도司徒․좌장사左長史에 이르렀다.” 종형從兄 왕안王晏에게 말하였다.
“형님은 무제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니, 이와 같이 그를 섬긴다면 임시방편으로 서로 필요할 수는 있겠으나 형님이 장차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책임을 지고 자결하면 그래도 집안을 보전하고 훗날의 명예는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안이 말하였다.
왕사원王思遠
“현재 죽을 먹는 형편이라 이러한 일을 할 겨를이 없다.”
왕안이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제수된 뒤 자제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융창隆昌(494) 말에 아계阿戎(왕사원)이 나에게 자결할 것을 권하였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 하였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제가 본 바와 같다면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注+③ 아계阿戎은 왕사원王思遠의 어릴 적 이름이다.
열흘 뒤 왕안이 화를 입었다.
注+④ ≪남제서南齊書≫ 〈왕안전王晏傳〉에 말하였다. “왕안王晏은 자字가 휴묵休黙이며 또한 자字가 사언士彦이라고도 한다. 무제武帝(소색蕭賾) 때 단양윤丹陽尹이 되었으며 〈왕실과〉 친밀하고 지위가 막중하였다. 명제明帝(소란蕭鸞)가 〈무제의〉 폐위를 도모하자 왕안이 즉각 호응하니, 명제는 일 때문에 왕안을 필요로 하긴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그를 의심하고 배척하였다. 왕안은 방비할 뜻을 가지지도 않고 조정에서 대부분의 사안을 독단으로 처리하였고, 자주 관상가를 불러 자신을 점치게 하였는데 그들은 〈왕안에게〉 크게 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왕안은〉 손님과 대화할 때 다른 사람을 물리치기를 좋아하였다. 명제는 왕안이 반역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마침내 몰래 왕안을 화림성華林省에 불러들이는 계책을 꾸며 그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