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晉武帝 講武於宣武場할새 帝欲偃武修文하여 親自臨幸하여 悉召群臣이라 山公謂不宜爾하여 因與諸尙書 言孫ㆍ吳用兵本意하여 遂究論하니 擧坐無不咨嗟하여 皆曰 山少傅乃天下名言注+① 史記曰 “孫武, 齊人. 吳起, 衛人.” 竝善兵法. 竹林七賢論曰 “咸寧中, 吳旣平, 上將爲桃林華山之事, 息役弭兵, 示天下以大安. 於是州郡悉去兵, 大郡置武吏百人, 小郡五十人. 時京師猶講武, 山濤因論孫吳用兵本意. 濤爲人常簡黙, 蓋以爲‘國者不可以忘戰,’ 故及之. 名士傳曰 “濤居魏晉之間, 無所標明. 嘗與尙書盧欽, 言及用兵本意, 武帝聞之曰 ‘山少傅名言也.’”이라하다
諸王 驕汰하여 輕遘禍難하니 於是 寇盜 處處蟻合이어늘 郡國 多以無備하여 不能制服하니 遂漸熾盛 皆如公言이라 時人以謂
山濤 不學孫吳 而闇與之理會라하고
王夷甫 亦歎云
闇與道合注+② 竹林七賢論曰 “永寧之後, 諸王構禍, 狡虜欻起, 皆如濤言.” 名士傳曰 “王夷甫推歎‘濤晻晻爲與道合, 其深不可測.’” 皆此類也.이라하다
【頭註】
劉云 “兵不當廢, 何在孫吳?”
李云 “此公, 非淸談之傑乎? 廢事也?”


14-9 무제武帝(사마염司馬炎)가 에서 강무講武할 때 무제는 무력을 중지하고 문화를 닦으려고 친히 선무장에 행차하여 신하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상서尙書들과 더불어 손무孫武오기吳起용병用兵본의本意에 대해 마침내 연구하고 토론하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어 모두 “산소부山少傅(산도)의 말이 천하의 명언이다.”라고 하였다.注+①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말하기를, “손무孫武나라 사람이다. 오기吳起나라 사람이다.” 하였는데, 모두 병법兵法에 뛰어났다.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말하였다. “ (사마염司馬炎)은 장차 과 같이 전쟁을 멈추고 군대를 쉬게 함으로써 천하에 크게 안정되었음을 보이려고 하였다. 이에 에 모두 군대를 없애고 큰 군에는 무리武吏 100인, 작은 군에는 50인을 두었다. 이때 경사京師에서는 여전히 강무講武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도山濤손무孫武오기吳起가 주장한 용병用兵에 대한 본래의 취지를 논하였던 것이다. 산도의 인품은 항상 조용하고 말이 없었으나, 국가는 전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명사전名士傳≫에 말하였다. “산도는 위진魏晉시대에 살았는데 의견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상서尙書 노흠盧欽과 더불어 용병의 본 취지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무제가 그 말을 듣고는 ‘산소부山少傅(산도)의 명언이로다.’라고 하였다.”
후에 여러 왕이 교만하여 경솔하게 화란禍亂을 만드니, 이에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군국郡國들 대부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해 제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점점 더 도적이 극성을 부렸으니, 이는 모두 공이 말한 대로였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였다.
“산도는 손무와 오기에게 배우지 않았으나 암암리에 그들과 뜻이 맞았다.”
왕이보王夷甫(왕연王衍) 역시 감탄하여 말하였다.
“공은 암암리에 에 맞았다.”注+②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말하기를, “영녕永寧(301~302) 이후에 여러 왕이 화란을 일으키고 교활한 오랑캐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 모두 산도山濤의 말과 같았다.” 하였다.
명사전名士傳≫에 말하기를, “왕이보王夷甫(왕연王衍)가 탄복하기를, ‘산도는 암암리에 와 합치되니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라고 하였다.
〈산도에 대한 품평은〉 모두 이러한 이다.
두주頭註
유신옹劉辰翁:군대를 없애서는 안 되니, 손무孫武오기吳起의 〈병서兵書〉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이지李贄:이 (산도山濤)은 청담의 걸출한 인물이 아닌가. 어찌 〈해야 할〉 일을 안 하는가.


역주
역주1 宣武場 : 洛陽城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군사들이 무술 훈련을 하거나 황제가 군대를 사열하던 곳이었다.
역주2 山公(山濤) : 205~283. 字는 巨源이고 河內郡 懷县 사람이다. 三国시대 魏나라와 西晉 시기에 활동한 名士로, 竹林七贤의 한 사람이다.
역주3 咸寧……평정되자 : ≪晉書≫ 〈山濤傳〉 注에 “〈武帝紀〉를 살펴보니 무제가 선무장에서 군대를 사열한 일은 함녕 3년(277)에 있었는데, 이때는 아직 吳나라를 평정하기 전이니, ≪竹林七賢論≫에서 ‘오나라가 평정되자[吳既平]’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 華山과 桃林의 일 : ≪書經≫ 〈武成〉에 周 武王이 殷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豐에 이르러 말을 華山의 남쪽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桃林의 들판에 풀어놓아, 천하에 무력을 쓰지 않을 뜻을 보였다[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示天下弗服]는 고사가 있다.
역주5 (可)[何] : 安永本에는 ‘可’로 되어 있으나, ≪李贄全集注≫에 의거하여 ‘何’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