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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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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宗 初徵柳宗元․劉禹錫至京이러니 俄皆貶謫하여 柳得柳州注+① 宋祁唐書曰 “柳宗元, 字子厚. 父鎭, 肅宗時, 殿中侍御史. 宗元第進士․博學弘詞科, 爲御史裏行. 善王叔文․韋執誼, 二人者奇其才, 及得政, 引內禁近, 欲大進用. 俄而叔文事敗, 貶永州司馬, 徙柳州刺史. 宗元旣放斥, 其文思益深, 堙厄感鬱, 一寓諸文. 世號柳柳州, 年四十七卒.”하고 劉得播州 以禹錫須侍老親하고 播州最爲惡處라하여 請以柳州換하니 上不許
曰但要與惡郡이니 豈繫母在리오
裵晉公進曰
陛下方侍太后하시니 不合發此言注+② 唐書曰 “順宗莊憲皇后王氏, 元和元年, 尊爲皇太后. 冊禮畢, 憲宗御紫宸殿宣赦, 太后居興慶宮.”이니이다


20-23 【헌종憲宗(이순李純)이 처음에는 유종원柳宗元유우석劉禹錫을 경성으로 불러들였다가 얼마 후 모두 먼 곳으로 내쳤는데, 유종원은 유주자사柳州刺史가 되고注+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 말했다 “유종원柳宗元자후子厚이다. 부친 유진柳鎭숙종肅宗(이형李亨)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였다. 유종원은 진사과進士科박학홍사과博學弘詞科에 급제해 어사이행御史裏行이 되었다. 왕숙문王叔文위집의韋執誼와 친했는데, 두 사람은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해 정권을 잡자 황제 가까이 두고서 크게 쓰고자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겨졌다. 유종원은 조정에서 멀리 내쳐지자 문장의 정취가 더 심오해졌으며 벼슬길의 험난함과 울분을 한결같이 문장에 담았다. 세상 사람들은 ‘유유주柳柳州’로 불렀으며 마흔 일곱살에 죽었다.” 유우석은 파주자사播州刺史가 되었다. 유종원은 유우석이 늙은 모친을 모셔야 하는데 파주는 가장 험한 곳이라고 하며 유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헌종이 허락하지 않고 말했다.
유종원柳宗元유종원柳宗元
“단지 험한 곳을 주려한다. 모친이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배진공裵晉公(배도裵度)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태후太后를 모시고 계시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注+② ≪당서唐書≫에 말했다. “순종順宗장헌황후莊憲皇后 왕씨王氏원화元和 원년(806)에 황태후皇太后추존推尊되었다. 책례冊禮가 끝나자 헌종憲宗자신전紫宸殿으로 나아가 사면령을 선포하였고, 황태후는 흥경궁興慶宮에 거처하였다.”
배도裵度배도裵度


역주
역주1 왕숙문이 몰락하자 : 順宗의 오랜 병이 낫지 않자 중앙과 지방에서 모두 太子를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왕숙문은 태자를 세우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廣陵王 李純을 태자로 삼는다는 칙령이 내려지자 모든 사람이 기뻐했는데 왕숙문만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며 감히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杜甫가 諸葛亮의 사당에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인 “군대가 출정하여 아직 승리하지 못했는데 몸이 먼저 죽어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옷깃을 눈물로 적시게 하네.[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를 읊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805년 태자가 국정을 대리하면서 渝州司户參軍으로 내쳐졌고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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