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① ≪진규별전陳逵别傳≫에 말하였다. “진규陳逵는 자字가 임도林道이고, 영천潁川허창許昌 사람이다. 조부 진회陳淮는 태위太尉였고, 부친 진진陳畛은 광록대부光祿大夫였다. 진규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깨끗한 인품과 명민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광릉공廣陵公을 세습하였으며 황문랑黃門郎과 서중랑장西中郎將을 역임하였고 양주梁州와 회남주淮南州 2개 주州를 다스리는 태수太守를 지냈다.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진규는 서중랑장, 회남淮南을 다스리는 태수가 되어 역양歷陽을 지켰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초대하여
에게 말하였다. ‘중국이 한창 혼란스러우니 오吳․월越 땅의 군사와 삼강三江의 견고함으로 충분히 성패를 볼 만하다. 공들이 내 아우를 잘 보필하라.’ 대황제大皇帝(손권孫權)를 불러 인신印信과 인끈을 주며 말하였다. ‘강동의 군사를 동원하여 두 진영 사이에서 〈전투의〉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경이 나만 못하지만,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인재를 부려 각각 충성을 바치게 하는 것은 내가 경만 못하다. 부디 북쪽으로 건너가지 말라.’ 말을 마치고 죽으니, 26세였다.”
역주4孫伯符(孫策)는……못하였구나 :
孫策(175~200)은 부친인 孫權의 뒤를 이어 江南 지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여 吳(삼국)왕조의 기초를 세웠고, 강남 지역 뿐 아니라 널리 中原을 통일하려는 큰 뜻을 품었으나 결국 그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여기서 진규는 자신도 손책과 마찬가지로 中原을 평정해야 하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한탄한 것이다.(≪世說箋本≫)
역주5≪吳錄≫ :
吳(三國)나라 歷史를 기술한 史書로, 晉나라 사람 張勃이 편찬하였다. 현재 1권이 남아 있으며, 이는 淸나라 때 重修한 본이다. ≪三国志≫의 ≪吴书≫ 중 상당 부분을 이 책에서 근거하였다고 한다.
역주6許贡 :
东汉末의 官吏로, 吴郡都尉․太守였을 때 몰래 曹操에게 전갈하여 孙策을 경계하게 하였다가 도리어 손책에게 발각되어 피살되었다.(≪三国志≫ 〈蜀志 许靖传〉, ≪三国志≫ 〈吴志 孙策传〉)
역주7張昭 :
156~236. 後漢 말기에서 呉(三国)나라에 걸쳐 활동했던 관원으로, 字는 子布이고 諡號는 文侯이다. 孫策이 揚州에서 挙兵했을 때 그의 参謀로 초빙되었고, 손책의 신임을 받아 정치․군사 일체를 관장하였다. 손책이 急死할 때 그를 침석에 불러 아우 孫権을 補佐하도록 부탁하였고, 손권에게 内政에 대해서는 張昭에게 相談하라고 명하였다.
역주8이리하여……없었다 :
좌중의 빈객들이 진규의 이런 호방함에 눌려 담론할 맛을 잃은 것이다.(≪世說箋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