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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補】
양성陽城은 기근이 들자 자취를 감추고 이웃 동리를 찾아가지 않았으며 느릅나무로 가루를 내어 죽을 만들어 먹으면서도 강론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종인
도아都兒가 양성의 덕에 교화되어 그 또한 방정하고 곧았으며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어떤 이가 그가 굶주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음식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나중에 쌀겨 가루 몇 그릇을 주자 그제야 받았다.
注+① 송기宋祁의 ≪신당서新唐書≫ 〈탁행전卓行傳〉에 말하였다. “양성陽城은 자字가 항종亢宗이고 정주定州 북평北平 사람이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가난하여 서책을 얻을 수 없자 아전이 되기를 구하여 집현원集賢院에 소속되어 집현원의 책을 훔쳐 밤낮으로 읽으며 문밖에 나가지 않기를 6년 동안 하니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관직을〉 떠나 중조산中條山에 은거하였는데 〈가난하여〉 아우인 양계陽堦․양역陽域과 항상 옷을 번갈아 갈아 입고 나갔다. 후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배연령裴延齡이 재상이 되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지방관으로 나가 도주자사道州刺史가 되었다.”양성陽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