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이들 모두 청주靑州의 선비들로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습착치習鑿齒는 ‘신농씨神農氏는 검중黔中에서 태어났고, ≪시경詩經≫ 〈소남召南〉에서는 아름다운 교화를 노래했고, ≪춘추春秋≫에서는 인재가 많다고 칭찬하였고, ≪시경詩經≫ 〈주남周南한광漢廣〉의 풍치風致는 〈제풍齊風계명鷄鳴〉과 다르다.
은 진晉의 시대에 상대가 없었다. 옛날 복희씨伏羲氏는 남군南郡에 장사 지냈고, 소호씨少昊氏는 장사長沙에 장사 지냈고, 순舜임금은 영릉零陵에 장사 지냈다. 그 인물들을 비교하자면 모범 됨이 이와 같고, 그 땅을 논하자면 뭇 성인들이 묻힌 곳이고, 그 풍치를 살펴보자면 시인들이 노래한 바이고, 있었던 일을 찾아본다면
역주15鄒奭 :
齊나라 사람으로 鄒衍의 학술 즉 陰陽說로 신임을 받아 大夫가 되었다. 마치 용의 무늬를 조각하듯 문장을 다듬어 사람들이 ‘雕龍奭’이라고 불렀다.
역주16莒大夫 :
莒나라 太史 敫(교)이다. 齊 閔王이 살해당하자 그 아들 法章이 성명을 바꾸고 莒太史집 머슴이 되었는데, 그 딸이 법장을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돌보았고 후에 법장이 襄王이 되자 왕후가 되었다. 거태사는 딸이 중매 없이 시집갔다고 하여 종신토록 보지 않았다.
역주17田子方 :
魏나라 사람으로 無擇이 이름이고 자방은 字이다. 공자의 제자인 子貢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도덕과 학문으로 제후에게 이름이 나서 魏文侯가 스승으로 모셨다.
역주18檀子 :
齊나라 사람이다. 平陸에서 회합했을 때 梁惠王이 威王에게 제나라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묻자 위왕이 보배같은 檀子ㆍ盼子ㆍ黔夫ㆍ種首의 네 신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역주19魯連 :
齊나라 高士 魯仲連이다.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분쟁을 중재하였으며 후에 田單이 왕에게 천거하여 작위를 주려고하자 海上으로 도망가 숨었다.
역주20淳于髡 :
齊나라 사람으로 威王의 데릴사위이다. 뛰어난 해학과 언변으로 간언을 하였고 여러 번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굴욕을 받은 적이 없다.
역주21盼子 :
齊나라 사람으로 田盼이다. 平陸의 회합에서 梁惠王이 제나라에 어떤 보물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威王이 말한 보배 같은 네 신하 중 한명이다.
역주22田光 :
田文의 잘못이다. 전문은 齊나라 사람으로 宰相이 되었다. 시호가 孟嘗君이다. 식객을 많이 둔 것으로 유명하며 秦나라에 갔다가 탈출할 때 식객 중에 도둑질에 뛰어난 사람과 닭울음 소리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무사히 탈출하였다는 ‘鷄鳴狗盜’ 고사가 유명하다.
역주23顔歜 :
齊나라의 處士로 宣王에게 선비를 귀하게 여겨야 함을 이야기하여 설득하였고, 선왕이 제자 되기를 청하며 부귀영화를 약속하였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역주24黔子 :
黔夫이다. 齊나라 사람으로 平陸의 회합에서 梁惠王이 제나라에 어떤 보물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威王이 말한 보배 같은 네 신하 중 한명이다.
역주25於(오)陵仲子 :
齊나라 陳仲子이다. 於陵에 은거할 때 楚王이 불렀으나 아내의 말을 따라 나아가지 않았다. 소소한 청렴결백을 주장하여 孟子에게 윤리를 저버리고 소소한 청렴에 급급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역주26王叔 :
≪新釋漢文大系 世說新語≫에서는 王斗로 보았다. 왕두는 齊나라 사람으로 宣王을 모시며 간언을 잘 하였고, 어진 인재 5인을 천거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하였다.
역주28伏徵君 :
伏勝이다.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경학자인데 秦나라 때 분서갱유로 없어진 ≪尙書≫를 외워 전하였다고 한다.
역주29終軍 :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武帝 때 謁者給事中이 되었고 후에 諫大夫가 되었다. 南越을 귀속시키기 위해 자원하여 사신으로 가서 南越王은 설득시켰으나 남월의 재상 呂嘉가 반대하여 남월왕과 사신들을 죽였고 종군도 그때 죽었다.
역주30東郭先生 :
산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재상이 되었으며 漢의 개국공신인 曹參에 의해 上賓으로 대우받았다.
역주31叔孫通 :
秦의 博士였다가 진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피하였다가 項羽의 밑으로 들어갔고, 후에 劉邦이 공격할 때 투항하였다. 漢 高祖의 명에 의해 예법을 정리하였다.
역주32萬石君 :
石奮이다. 漢文帝 때 太中大夫가 되고 景帝 때 九卿에 이른 石奮이다. 石建ㆍ石甲ㆍ石乙ㆍ石慶 등 네 아들과 함께 각기 연간 2천 석의 녹을 받는 고관이 되어 5부자의 녹이 만석에 이르렀으므로 만석군으로 불렸다.
역주33東方朔 :
前漢의 관료로 武帝 때 太中大夫給事中에 올랐다. 걸출한 외모, 익살스러운 언변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유명하며 정치에 관해 간언을 잘하였다.
역주34安期先生 :
琅琊 阜鄕 사람으로 동해 가에서 약을 팔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千歲翁이라 불렀다. 秦 始皇이 동쪽으로 노닐다 만나서 사흘 밤낮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금은보화를 주었으나, 모두 그대로 남겨 두고 봉래산으로 떠났다.
역주35伏三老 :
後漢 사람인 伏恭으로 明帝와 章帝 때의 大臣이다. 劇의 縣令과 常山太守 등을 역임했는데 공정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선정을 베풀고 학교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황제가 은퇴한 三公(三老)의 예로 대우하였다.
역주36江革 :
後漢 때의 큰 효자로,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다가 난리를 만나자 어머니를 업고 산속으로 피했는데, 피란길에 賊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니 적이 감동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역주37逢萌 :
王莽의 정사에 환멸을 느껴 관을 벗어서 동쪽 도성의 문에 걸어 놓고는 곧장 시골로 돌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 光武帝 때 琅琊의 勞山에서 도를 닦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역주38禽慶 :
漢나라 王莽 때의 은자로, 자는 子夏이고 北海 사람이다. 유생으로 관직을 버리고 왕망 정권에 출사하지 않았다. 五嶽 등 명산을 유람하며 생을 마쳤다.
역주39承幼子 :
承宮이다. ≪後漢書≫에는 字가 少子로 되어 있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苦學하여 經典에 밝았다. 천하가 혼란할 때 蒙陰山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자 넘겨주고 떠난 것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後漢 明帝 때 侍中과 祭酒를 지냈다.
역주40徐防 :
永平 연간에 孝廉科에 천거되었고 벼슬은 司徒에 이르렀다. 安帝 때 太尉인 徐防이 나라에 도적이 들고 장마로 인한 災異를 당하자 자신의 책임이라고 상소하여 면직되었는데, 이때부터 재이를 만나면 三公이 면직되는 전례가 생겼다.
역주41薛方 :
西漢 말기의 高士이다. 王莽이 정권을 잡고 安車를 보내 불렀으나 ‘위에 堯舜과 같은 이가 있으면 巢父와 許由 같은 이가 있을 것이며 자신은 허유를 본받겠다.’라고 하며 사양하고 집에서 경서를 가르치며 살았다.
역주61子文 :
춘추시대 楚나라 大夫 鬪穀於菟(투누오도)이며 鬪於菟(투오도)라고도 한다. 세 번 令尹이 되었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그만두어도 성내는 기색이 없었으며 후임자에게 착실하게 업무를 인계해 주었으므로, 孔子가 충성스럽다고 평하였다.
역주62孫叔敖 :
춘추시대 楚나라 재상으로 선정을 베풀어 莊王이 覇業을 달성하도록 하였다. 어릴 때 나가 놀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 “이 뱀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데, 이 뱀을 그냥 두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고 죽여 묻은 다음 울고 돌아오니 그의 모친이 “남에게 陰德을 끼쳤으니 죽지 않고 오래 살 것이다.”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역주63接輿 :
춘추시대 楚나라 은자로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했다.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며 “鳳이여, 鳳이여! 어찌 德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諫할 수 없지만 오는 것은 아직 따라잡을 수 있으니, 그만둘지어다, 그만둘지어다! 오늘날 政事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태롭다.”라고 하였다.
역주64漁夫 :
전국시대 楚나라 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초췌한 안색으로 강변을 거닐다가 만난 어부로, 굴원이 더러운 세상에 대해 푸념하자, 어부가 웃으면서 “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겠네.”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떠났다.
역주65熊宜僚 :
춘추시대 楚나라 勇士로, 구슬을 공중에 높이 던졌다가 받는 놀이인 弄丸의 명수였다. 宋과 싸울 때 軍前에서 그 재주를 부려 송의 군사들의 정신을 팔리게 하여 참패하게 만들었다. 楚나라 太子 建의 아들인 白公에게 楚王과 子西․子期를 죽이는 데 동참할 것을 제안받았는데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꼼짝하지 않고 거절하였다.
역주66屠羊說 :
≪莊子≫ 〈讓王〉에 나오는데, 전국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양을 잡는 백정 說이다. 昭王이 전쟁에 패해 도망갈 적에 도양열이 소왕을 수행하여 공을 세웠는데, 소왕이 환국한 뒤 내린 상과 작록을 왕으로 하여금 작록을 함부로 베푼다는 말을 듣게 할 수 없다고 하며 끝내 받지 않고 계속 양 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역주67老萊子 :
춘추시대 楚나라의 隱士로, 70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 난을 피해 있을 때 왕이 불렀으나 아내의 말을 듣고 나아가지 않았다.
역주68屈原 :
전국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三閭大夫를 지냈으나 간신들의 참언 때문에 추방당해 방랑하다가 汨羅에 투신하여 죽었다. 주요 작품으로 ≪離騷≫, ≪漁父辭≫가 있다.
역주69鄧禹 :
後漢 건국의 최고 功臣 중의 하나로, 광무제 즉위 후에 大司徒와 太傅를 지냈으며 高密侯에 봉해졌다.
역주70卓茂 :
後漢 초기의 名臣이다. 고금에 밝고 박학다식하여 ‘通儒’라 불렸다. 王莽의 簒奪이 있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光武帝 때 太傅에 제수되고 褒德侯에 봉해졌다.
역주71龐公 :
後漢 사람 龐德公이다. 劉表가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鹿門山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역주72龐士元 :
蜀漢의 軍師 龐統이다. 처음에 劉備가 외모만 보고 방통을 지방인 耒陽縣의 현령으로 보내자 방통은 부임한 후 백여 일 동안 술만 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유비가 장비를 보내어 추궁하자 취한 채 그간 밀린 공무를 반나절 만에 처리하였다고 한다.
역주73何晏 :
삼국시대 魏나라 대신으로 大將軍 何進의 손자이자 曹操의 사위이고, 魏晉 시대 玄學의 창시자 중 한사람이다. 司馬懿가 軍權을 장악한 高平陵의 事件 후 멸문지화를 당했다.
역주74鄧颺 :
삼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穎川太守와 侍中尙書를 지냈다. 曹爽ㆍ何晏 등과 함께 司馬懿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