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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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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中郎 令伏玄度注+① 伏滔別見. 習鑿齒 論青楚人物注+② 滔集載其論略曰 “滔以‘春秋時鮑叔․管仲․隰朋․召忽․輪扁․寗戚․麥丘人․逢丑父․晏嬰․涓子, 戰國時公羊高․孟軻․鄒衍․田單․荀卿․鄒奭․莒大夫․田子方․檀子․魯連․淳于髡․盼子․田光․顔歜․黔子․於陵仲子․王叔․即墨大夫, 前漢時伏徵君․終軍․東郭先生․叔孫通․萬石君․東方朔․安期先生, 後時大司徒伏三老․江革․逢萌․禽慶․承幼子․徐防․薛方․鄭康成․周孟玉․劉祖榮․臨孝存․侍其․元矩․孫碩․劉仲謀․劉公山․王儀伯․郞宗․禰正平․劉成國, 魏時管幼安․邴根矩․華子魚․徐偉長․任昭先․伏高陽, 此皆靑士有才德者也.’ 鑿齒以‘神農生於黔中, 召南詠其美化, 春秋稱其多才, 漢廣之風, 不同鷄鳴之篇. 子文․叔敖羞與管․晏比德. 接輿之歌鳳兮, 漁父之詠滄浪, 之折子貢, 市南宜僚․屠羊說之不爲利回. 魯仲連不及老萊夫妻, 田光於屈原, 鄧禹․卓茂無敵於天下, 管幼安不勝龐公, 龐士元不推華子魚, 何․鄧二尙書, 獨步於魏朝, 樂令無對於晉世. 昔伏羲葬南郡, 少昊葬長沙, 舜葬零陵. 比其人, 則準的如此, 論其土, 則群聖之所葬, 考其風, 則詩人之所歌, 尋其事, 則未有赤眉․黃巾之賊. 此何如靑州耶.’ 滔與相往反, 鑿齒無以對也.”이라 臨成 以示韓康伯한대 康伯 都無言하니 王曰
何故不言고하니
韓曰
無可 無不可注+③ 馬融注論語曰 “惟義所在.”라하다


4-71 왕중랑王中郎(왕탄지王坦之)이 복현도伏玄度(복도伏滔)와注+복도伏滔는 따로 보인다. 습착치習鑿齒에게 청주青州(형주荊州)의 인물人物들에 대해 논평하게 하였다.注+② ≪복도집伏滔集≫에 그 논평의 대략이 실려 있다. “복도伏滔는 ‘춘추春秋시대의 와, 전국戰國시대의 맹가孟軻(맹자孟子)․(순자荀子)․(전반田盼)․(진중자陳仲子)․와, 전한前漢시대의 (복승伏勝)․(석분石奮)․과, 후한後漢시대의 대사도大司徒 (복공伏恭)․(승궁承宮)․(정현鄭玄)․(주구周璆)․(유총劉寵)․(송칙宋則)․(손숭孫崇)․(유대劉岱)․(왕장王璋)․(예형禰衡)․과, 나라 시대의 (관녕管寧)․(병원邴原)․(화흠華歆)․(서간徐幹)․(임하任嘏)․은 이들 모두 청주靑州의 선비들로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습착치習鑿齒는 ‘신농씨神農氏검중黔中에서 태어났고, ≪시경詩經≫ 〈소남召南〉에서는 아름다운 교화를 노래했고, ≪춘추春秋≫에서는 인재가 많다고 칭찬하였고, ≪시경詩經≫ 〈주남周南 한광漢廣〉의 풍치風致는 〈제풍齊風 계명鷄鳴〉과 다르다. 관중管仲안영晏嬰이 비교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는 「봉황이여! 봉황이여!」라고 노래를 불렀고, 창랑滄浪을 노래하였고, 한음漢陰의 노인은 자공子貢을 꾸짖었고, 시장 남쪽의 은 이익 때문에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노중련魯仲連 부부에 미치지 못하였고, 전광田光만 못하였고, 천하天下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관유안管幼安보다 뛰어나지 못하였고, 화자어華子魚에 손색이 없었고, 의 두 상서尙書나라 조정에서 독보적이었고, 의 시대에 상대가 없었다. 옛날 복희씨伏羲氏남군南郡에 장사 지냈고, 소호씨少昊氏장사長沙에 장사 지냈고, 임금은 영릉零陵에 장사 지냈다. 그 인물들을 비교하자면 모범 됨이 이와 같고, 그 땅을 논하자면 뭇 성인들이 묻힌 곳이고, 그 풍치를 살펴보자면 시인들이 노래한 바이고, 있었던 일을 찾아본다면 같은 도적이 아직까지 없었다. 이 어찌 청주靑州와 같겠는가.’라고 하였다. 복도가 〈습착치와〉 서로 반복해 논박하니 습착치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완성되어 한강백韓康伯(한백韓伯)에게 보여주었는데 한강백이 도무지 말이 없자 왕중랑이 말했다.
“어찌하여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한강백이 말했다.
함도 없고 불가不可함도 없습니다.”注+③ ≪논어論語≫ 〈미자微子〉의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에 대한〉 마융馬融에 “오직 가 있는 곳을 따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鮑叔 : 鲍叔牙의 별칭이다. 춘추시대 齊나라 大夫로 管仲을 桓公에게 추천하여 환공이 霸業을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역주2 管仲 : 이름은 夷吾이고 齊 桓公을 도와 覇者가 되게 하였다.
역주3 隰朋 : 齊나라 사람으로 관중을 도와 桓公의 覇業을 성공시켰다.
역주4 召忽 : 齊나라 대부로 公子 糾의 사부가 되었으며 그가 환난을 당했을 때에 목숨을 바쳤다.
역주5 輪扁 : 齊나라 사람으로 수레바퀴의 명인이다. 齊 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수레바퀴를 만드는 것에 의탁하여 책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라고 이야기하였다.
역주6 寗戚 : 衛나라 사람으로 남의 소를 먹이는 일을 하다가 齊 桓公에게 인정받아 上卿이 되고 재상까지 되었다.
역주7 麥丘人 : ≪韓詩外傳≫에 의하면 齊 桓公에게 충고했다고 하는 麥丘의 사람이다.
역주8 逢丑父 : 齊나라 사람으로 頃公의 車右로서 경공이 晉의 欒書와 鞍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는데 봉축보가 경공과 자리를 바꾸어 경공이 화를 면하도록 하였다.
역주9 晏嬰 : 齊나라 대부로 靈公과 莊公을 섬겼고 景公의 재상이 되었다.
역주10 涓子 : ≪列仙傳≫에 의하면 齊나라 사람으로 仙人이며 ≪天人經≫ 48편을 지었다고 한다.
역주11 公羊高 : 齊나라 사람으로 子夏의 제자이며 ≪春秋公羊傳≫을 지었다.
역주12 鄒衍 : 齊나라 臨淄 사람으로 燕의 昭王과 惠王을 모셨으며 陰陽家의 비조로 불린다.
역주13 田單 : 齊나라 臨淄 사람으로 燕의 군대를 卽墨城에서 막아내고, 그 뒤 소에게 무기를 장착하고 꼬리에 불을 붙여 한밤중에 燕의 군대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역주14 荀卿 : 荀子이다. 越나라 사람으로 性惡說을 주장하였다.
역주15 鄒奭 : 齊나라 사람으로 鄒衍의 학술 즉 陰陽說로 신임을 받아 大夫가 되었다. 마치 용의 무늬를 조각하듯 문장을 다듬어 사람들이 ‘雕龍奭’이라고 불렀다.
역주16 莒大夫 : 莒나라 太史 敫(교)이다. 齊 閔王이 살해당하자 그 아들 法章이 성명을 바꾸고 莒太史집 머슴이 되었는데, 그 딸이 법장을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돌보았고 후에 법장이 襄王이 되자 왕후가 되었다. 거태사는 딸이 중매 없이 시집갔다고 하여 종신토록 보지 않았다.
역주17 田子方 : 魏나라 사람으로 無擇이 이름이고 자방은 字이다. 공자의 제자인 子貢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도덕과 학문으로 제후에게 이름이 나서 魏文侯가 스승으로 모셨다.
역주18 檀子 : 齊나라 사람이다. 平陸에서 회합했을 때 梁惠王이 威王에게 제나라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묻자 위왕이 보배같은 檀子ㆍ盼子ㆍ黔夫ㆍ種首의 네 신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역주19 魯連 : 齊나라 高士 魯仲連이다.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분쟁을 중재하였으며 후에 田單이 왕에게 천거하여 작위를 주려고하자 海上으로 도망가 숨었다.
역주20 淳于髡 : 齊나라 사람으로 威王의 데릴사위이다. 뛰어난 해학과 언변으로 간언을 하였고 여러 번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굴욕을 받은 적이 없다.
역주21 盼子 : 齊나라 사람으로 田盼이다. 平陸의 회합에서 梁惠王이 제나라에 어떤 보물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威王이 말한 보배 같은 네 신하 중 한명이다.
역주22 田光 : 田文의 잘못이다. 전문은 齊나라 사람으로 宰相이 되었다. 시호가 孟嘗君이다. 식객을 많이 둔 것으로 유명하며 秦나라에 갔다가 탈출할 때 식객 중에 도둑질에 뛰어난 사람과 닭울음 소리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무사히 탈출하였다는 ‘鷄鳴狗盜’ 고사가 유명하다.
역주23 顔歜 : 齊나라의 處士로 宣王에게 선비를 귀하게 여겨야 함을 이야기하여 설득하였고, 선왕이 제자 되기를 청하며 부귀영화를 약속하였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역주24 黔子 : 黔夫이다. 齊나라 사람으로 平陸의 회합에서 梁惠王이 제나라에 어떤 보물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威王이 말한 보배 같은 네 신하 중 한명이다.
역주25 於(오)陵仲子 : 齊나라 陳仲子이다. 於陵에 은거할 때 楚王이 불렀으나 아내의 말을 따라 나아가지 않았다. 소소한 청렴결백을 주장하여 孟子에게 윤리를 저버리고 소소한 청렴에 급급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역주26 王叔 : ≪新釋漢文大系 世說新語≫에서는 王斗로 보았다. 왕두는 齊나라 사람으로 宣王을 모시며 간언을 잘 하였고, 어진 인재 5인을 천거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하였다.
역주27 即墨大夫 : ≪新釋漢文大系 世說新語≫에서는 即墨成으로 보았다.
역주28 伏徵君 : 伏勝이다.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경학자인데 秦나라 때 분서갱유로 없어진 ≪尙書≫를 외워 전하였다고 한다.
역주29 終軍 :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武帝 때 謁者給事中이 되었고 후에 諫大夫가 되었다. 南越을 귀속시키기 위해 자원하여 사신으로 가서 南越王은 설득시켰으나 남월의 재상 呂嘉가 반대하여 남월왕과 사신들을 죽였고 종군도 그때 죽었다.
역주30 東郭先生 : 산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재상이 되었으며 漢의 개국공신인 曹參에 의해 上賓으로 대우받았다.
역주31 叔孫通 : 秦의 博士였다가 진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피하였다가 項羽의 밑으로 들어갔고, 후에 劉邦이 공격할 때 투항하였다. 漢 高祖의 명에 의해 예법을 정리하였다.
역주32 萬石君 : 石奮이다. 漢文帝 때 太中大夫가 되고 景帝 때 九卿에 이른 石奮이다. 石建ㆍ石甲ㆍ石乙ㆍ石慶 등 네 아들과 함께 각기 연간 2천 석의 녹을 받는 고관이 되어 5부자의 녹이 만석에 이르렀으므로 만석군으로 불렸다.
역주33 東方朔 : 前漢의 관료로 武帝 때 太中大夫給事中에 올랐다. 걸출한 외모, 익살스러운 언변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유명하며 정치에 관해 간언을 잘하였다.
역주34 安期先生 : 琅琊 阜鄕 사람으로 동해 가에서 약을 팔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千歲翁이라 불렀다. 秦 始皇이 동쪽으로 노닐다 만나서 사흘 밤낮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금은보화를 주었으나, 모두 그대로 남겨 두고 봉래산으로 떠났다.
역주35 伏三老 : 後漢 사람인 伏恭으로 明帝와 章帝 때의 大臣이다. 劇의 縣令과 常山太守 등을 역임했는데 공정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선정을 베풀고 학교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황제가 은퇴한 三公(三老)의 예로 대우하였다.
역주36 江革 : 後漢 때의 큰 효자로,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다가 난리를 만나자 어머니를 업고 산속으로 피했는데, 피란길에 賊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니 적이 감동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역주37 逢萌 : 王莽의 정사에 환멸을 느껴 관을 벗어서 동쪽 도성의 문에 걸어 놓고는 곧장 시골로 돌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 光武帝 때 琅琊의 勞山에서 도를 닦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역주38 禽慶 : 漢나라 王莽 때의 은자로, 자는 子夏이고 北海 사람이다. 유생으로 관직을 버리고 왕망 정권에 출사하지 않았다. 五嶽 등 명산을 유람하며 생을 마쳤다.
역주39 承幼子 : 承宮이다. ≪後漢書≫에는 字가 少子로 되어 있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苦學하여 經典에 밝았다. 천하가 혼란할 때 蒙陰山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자 넘겨주고 떠난 것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後漢 明帝 때 侍中과 祭酒를 지냈다.
역주40 徐防 : 永平 연간에 孝廉科에 천거되었고 벼슬은 司徒에 이르렀다. 安帝 때 太尉인 徐防이 나라에 도적이 들고 장마로 인한 災異를 당하자 자신의 책임이라고 상소하여 면직되었는데, 이때부터 재이를 만나면 三公이 면직되는 전례가 생겼다.
역주41 薛方 : 西漢 말기의 高士이다. 王莽이 정권을 잡고 安車를 보내 불렀으나 ‘위에 堯舜과 같은 이가 있으면 巢父와 許由 같은 이가 있을 것이며 자신은 허유를 본받겠다.’라고 하며 사양하고 집에서 경서를 가르치며 살았다.
역주42 鄭康成 : 康成은 鄭玄의 字이다. 大儒學者로 漢代의 경학을 집대성하였다. ≪詩≫ㆍ≪書≫ㆍ≪易≫ㆍ≪禮記≫ㆍ≪儀禮≫ㆍ≪論語≫ㆍ≪孝經≫ 등을 注解하였다.
역주43 周孟玉 : 周璆이다. 陳蕃이 樂安太守로 있으면서 주교를 초청하였는데, 진번은 탁자를 하나 매달아 두고 오직 주교가 왔을 때만 이 탁자를 내려 접대하고 끝나면 다시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역주44 劉祖榮 : 後漢의 宗室인 劉寵이다. 會稽太守로 있을 때 청렴하고 善政을 베풀었는데, 승진하여 조정으로 돌아갈 때 山陰縣에서 5, 6명의 노인이 각자 100錢을 가지고 와서 노자로 주자 유총은 노인들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각각 1전씩만 받았다.
역주45 臨孝存 : 未詳이다.
역주46 侍其 : 復姓이다. 凌迪知의 ≪万姓統譜≫에 따르면 漢나라 酈食其(역이기)의 曾孫이 하사받아 食其를 氏로 삼고 玄孫이 武帝 때에 侍中이 되어 侍其氏로 바꾸었다고 한다.
역주47 元矩 : 後漢 때의 사람으로 東平相 宋漢의 아들 宋則이다. 鄢陵令이었을 때 10살 된 아들이 노비와 쇠뇌를 쏘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잘못되어 죽었는데, 송칙은 사정을 살펴보고 그 노비를 용서하였다.
역주48 孫賓碩 : 後漢의 孫崇이다. 桓帝 때 中常侍 唐衡의 난을 피해 성명을 바꾸고 떡을 팔던 趙岐를 숨겨주었는데, 조기는 그 도움으로 벽장 속에 숨어 지내면서 ≪孟子章句≫를 썼다.
역주49 劉仲謀 : 未詳이다.
역주50 劉公山 : 劉寵의 조카인 劉岱이다. 兗州刺史로 있으면서 黃巾賊과 싸우다가 죽었다.
역주51 王儀伯 : 後漢 때의 王璋이다. 벼슬은 少府卿에 이르렀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역주52 郞宗 : ≪京氏易≫을 배웠고 점술에 능했다. 吳의 縣令일 때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점을 쳐 京師에 불이 나는 것을 맞췄는데 이로 인해 博士로 부름을 받자 점 때문에 알려진 것을 부끄러워하여 밤에 印信을 걸어두고 떠나서는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역주53 禰正平 : 禰衡이다. 개성이 강하였고 재주를 믿고 오만하였다. 공융이 ≪荐禰衡表≫를 지어 曹操에게 예형을 추천했는데,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아 조조의 미움을 받아 鼓手가 되었던 이야기가 전한다.
역주54 劉成國 : 未詳이다.
역주55 管幼安 : 삼국시대 魏나라의 管寧이다. 黃巾賊의 난을 피해 遼東으로 건너가 20여 년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魏明帝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0여 년 동안 하나의 나무 榻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무릎이 닿은 곳이 닳아 구멍이 뚫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역주56 邴根矩 : 삼국시대 魏나라의 邴原이다. 젊을 때 管寧과 더불어 절조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역주57 華子魚 : 삼국시대 魏나라의 華歆이다. 曹操에게 발탁되어 尙書를 역임하였고 曹丕 때에 相國이 되고 博平侯에 봉해졌다. 管寧과 함께 독서할 때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달려 나가 구경하자 관영이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역주58 徐偉長 : 徐幹으로 後漢 말 獻帝의 建安 연간에 활동했던 7인의 문학가인 建安七子의 한사람이다. 어려서 五經을 익히고, 성인이 되기 전에 이미 뛰어난 문장과 높은 식견으로 이름을 알렸다.
역주59 任昭先 : 삼국시대 魏나라 任嘏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神童으로 불렸다. 文帝 때 黃門侍郞이 되었고 東郡, 趙郡, 河東의 태수를 역임했다.
역주60 伏高陽 : 未詳이다.
역주61 子文 : 춘추시대 楚나라 大夫 鬪穀於菟(투누오도)이며 鬪於菟(투오도)라고도 한다. 세 번 令尹이 되었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그만두어도 성내는 기색이 없었으며 후임자에게 착실하게 업무를 인계해 주었으므로, 孔子가 충성스럽다고 평하였다.
역주62 孫叔敖 : 춘추시대 楚나라 재상으로 선정을 베풀어 莊王이 覇業을 달성하도록 하였다. 어릴 때 나가 놀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 “이 뱀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데, 이 뱀을 그냥 두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고 죽여 묻은 다음 울고 돌아오니 그의 모친이 “남에게 陰德을 끼쳤으니 죽지 않고 오래 살 것이다.”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역주63 接輿 : 춘추시대 楚나라 은자로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했다.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며 “鳳이여, 鳳이여! 어찌 德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諫할 수 없지만 오는 것은 아직 따라잡을 수 있으니, 그만둘지어다, 그만둘지어다! 오늘날 政事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태롭다.”라고 하였다.
역주64 漁夫 : 전국시대 楚나라 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초췌한 안색으로 강변을 거닐다가 만난 어부로, 굴원이 더러운 세상에 대해 푸념하자, 어부가 웃으면서 “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겠네.”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떠났다.
역주65 熊宜僚 : 춘추시대 楚나라 勇士로, 구슬을 공중에 높이 던졌다가 받는 놀이인 弄丸의 명수였다. 宋과 싸울 때 軍前에서 그 재주를 부려 송의 군사들의 정신을 팔리게 하여 참패하게 만들었다. 楚나라 太子 建의 아들인 白公에게 楚王과 子西․子期를 죽이는 데 동참할 것을 제안받았는데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꼼짝하지 않고 거절하였다.
역주66 屠羊說 : ≪莊子≫ 〈讓王〉에 나오는데, 전국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양을 잡는 백정 說이다. 昭王이 전쟁에 패해 도망갈 적에 도양열이 소왕을 수행하여 공을 세웠는데, 소왕이 환국한 뒤 내린 상과 작록을 왕으로 하여금 작록을 함부로 베푼다는 말을 듣게 할 수 없다고 하며 끝내 받지 않고 계속 양 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역주67 老萊子 : 춘추시대 楚나라의 隱士로, 70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 난을 피해 있을 때 왕이 불렀으나 아내의 말을 듣고 나아가지 않았다.
역주68 屈原 : 전국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三閭大夫를 지냈으나 간신들의 참언 때문에 추방당해 방랑하다가 汨羅에 투신하여 죽었다. 주요 작품으로 ≪離騷≫, ≪漁父辭≫가 있다.
역주69 鄧禹 : 後漢 건국의 최고 功臣 중의 하나로, 광무제 즉위 후에 大司徒와 太傅를 지냈으며 高密侯에 봉해졌다.
역주70 卓茂 : 後漢 초기의 名臣이다. 고금에 밝고 박학다식하여 ‘通儒’라 불렸다. 王莽의 簒奪이 있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光武帝 때 太傅에 제수되고 褒德侯에 봉해졌다.
역주71 龐公 : 後漢 사람 龐德公이다. 劉表가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鹿門山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역주72 龐士元 : 蜀漢의 軍師 龐統이다. 처음에 劉備가 외모만 보고 방통을 지방인 耒陽縣의 현령으로 보내자 방통은 부임한 후 백여 일 동안 술만 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유비가 장비를 보내어 추궁하자 취한 채 그간 밀린 공무를 반나절 만에 처리하였다고 한다.
역주73 何晏 : 삼국시대 魏나라 대신으로 大將軍 何進의 손자이자 曹操의 사위이고, 魏晉 시대 玄學의 창시자 중 한사람이다. 司馬懿가 軍權을 장악한 高平陵의 事件 후 멸문지화를 당했다.
역주74 鄧颺 : 삼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穎川太守와 侍中尙書를 지냈다. 曹爽ㆍ何晏 등과 함께 司馬懿에게 살해되었다.
역주75 樂令 : 樂廣이다. 西晉의 尙書右僕射와 領吏部를 지냈다. 談論의 명수이다.
역주76 赤眉 : 後漢 초기에 山東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리이다.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하여 모두 눈썹을 빨갛게 물들인 것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역주77 黃巾 : 後漢 말기에 張角을 우두머리로 반란을 일으킨 무리이다. 머리에 누런 수건을 쓴 것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역주78 (吳)[漢] : 저본에는 ‘吳’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과 각본의 ≪世說新語≫에 의거하여 ‘漢’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9 (寶)[賓] : 저본에는 ‘寶’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과 각본의 ≪世說新語≫에 의거하여 ‘賓’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0 漢陰丈人 : 孔子의 弟子 子貢이 楚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漢水의 남쪽에서 우물물을 긷는 노인을 만나 두레박의 편리함을 가르쳐주자 노인이 도리어 그것의 잘못을 말하여 자공을 부끄럽게 하였다.
역주81 (之)[遜] : 저본에는 ‘之’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 소재 ≪世說新語≫에 의거하여 ‘遜’으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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