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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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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下諸賢 各有儁才子 籍子渾 器量弘曠注+① 世語曰 “渾, 字長成. 淸虛寡欲. 位至太子中庶子.”하고 康子紹 淸遠雅正하고 濤子簡 疎通高素注+② 虞預晉書曰 “簡, 字季倫. 平雅有父風, 與嵇紹ㆍ劉漠等齊名. 遷尙書, 出爲征南將軍.”하고 咸子瞻 虛夷有遠志하고 瞻弟孚 爽朗多所遺注+③ 中興書曰 “孚, 風韻疎誕, 少有門風. 初爲安東參軍, 蓬髮飲酒, 不以王務嬰心.”하고
秀子純悌 并令淑有淸流注+④ 竹林七賢論曰 “純, 字長悌, 位至侍中. 悌字叔遜, 位至御史中丞.” 晉諸公賛曰 “洛陽敗, 純悌出奔, 爲賊所害.”하고 戎子萬子 有大成之風이나 苗而不秀注+⑤ 晉諸公賛曰 “王綏, 字萬子. 辟太尉掾, 不就. 年十九卒.” 晉書曰 “戎子萬有美號, 而太肥. 戎令食糠, 而肥愈甚也.” 唯伶子無聞注+⑥ 名士傳曰 “劉伶, 字伯倫, 沛郡人. 肆意放蕩, 以宇宙爲狹. 嘗乗鹿車, 携一壷酒, 使人荷隨之, 云死便掘地以埋. 遨遊一世.” 竹林七賢論曰 “伶, 處天地間, 悠悠蕩蕩, 無所用心. 嘗與俗士相牾, 其人攘袂而起, 欲必之. 伶和其色曰 ‘雞肋豈足以當尊拳?’ 其人不覺廢然而返. 未嘗措意文章, 終其世, 但著酒頌一篇而已.”이라 凡此諸子 唯瞻爲冠하고 紹簡亦見重當世


15-33 죽림竹林의 여러 현자賢者는 각각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들이 있었다. 완적阮籍의 아들 원혼阮渾은 기국과 도량이 크고 넓었고,注+에 말하였다. “원혼阮渾장성長成이다. 청허淸虛하고 욕심이 없었다. 지위가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에 이르렀다.” 혜강嵇康의 아들 혜소嵇紹청원淸遠하고 아정雅正하였으며,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은 거칠 것 없이 대범하고 고상하면서 청검淸儉하였고,注+우예虞預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산간山簡계륜季倫이다. 조용하고 고상하여 부친의 풍모가 있었다. 혜소嵇紹유막劉漠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상서尙書로 옮겼으며 지방관으로 나가 정남장군征南将軍이 되었다.” 원함阮咸의 아들 원첨阮瞻은 욕심이 없고 조용하며 원대한 뜻이 있었고, 완첨의 아우 원부阮孚는 대범하고 맑아서 〈세상사를〉 내버려두는 일이 많았고,注+③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원부阮孚는 풍모와 운치가 소탈하고 호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가문의 유풍을 지녔다. 처음에 안동참군安東參軍이 되었는데, 머리를 산발하고 술을 마시며 공무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상수向秀의 아들 상순向純상제向悌는 모두 빼어나 청류淸流의 풍모가 있었고,注+④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말하였다. “상순向純장제長悌이고 지위가 시중에 이르렀다. 상제向悌는 자가 숙손叔遜이고 지위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진제공찬晉諸公賛≫에 말하였다. “낙양이 함락되자 상순과 상제가 달아났으나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융王戎의 아들 왕만자王萬子(왕수王綏)는 대성할 수 있는 기풍을 지녔으나 싹은 났어도 꽃은 피우지 못하고 죽었다.注+⑤ ≪진제공찬晉諸公賛≫에 말하였다. “왕수王綏만자萬子이다. 태위연太尉掾으로 초빙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세에 죽었다.”
진서晉書≫ 〈왕융전王戎傳〉에 말하였다. “왕융王戎의 아들 왕만王萬은 좋은 평판이 있었으나 너무나 비대하였다. 왕융이 쌀겨를 먹게 하였으나 더욱 더 비대해졌다.”
유령劉伶의 아들만은 알려지지 않았다.注+⑥ ≪명사전名士傳≫에 말하였다. “유령劉伶백륜伯倫이고 패군沛郡 사람이다. 자기 멋대로 하고 방탕하였으며, 우주를 좁다고 여겼다. 한번은 녹거鹿車를 타고 술 한 병을 지니고서, 사람을 시켜 가래[]를 메고 자신을 따르게 하며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바로 땅을 파고 묻어라.’ 하였다. 육체를 토목土木처럼 여겼고 온 세상을 떠돌며 놀았다.”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말하였다. “유령은 천지 사이에 살면서 훨훨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여 신경 쓰는 것이 없었다. 한번은 세속의 선비와 뜻이 맞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기어이 때리려 하자 유령이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말하기를, ‘계륵鷄肋이 어찌 존자尊者의 주먹을 감당할 만 하겠습니까.’ 하니 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화를 풀고 돌아갔다. 문장을 지을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종신토록 〈주송酒頌〉 한 편만 지었을 뿐이다.”
이들 여러 아들 중에 완첨이 으뜸이고 혜소와 산간도 당시에 인정을 받았다.
죽림칠현竹林七賢죽림칠현竹林七賢


역주
역주1 魏晉世語 : ≪世語≫라고도 한다. 郭颁이 10권으로 편찬하였다. 후에 唐 太宗 李世民의 이름을 讳하여 ≪魏晉代语≫․≪魏晉俗语≫라고도 하였고, ≪魏晉代说≫․≪魏晉世论≫이라고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原书는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郭颁은 郭班이라고도 하며, 字는 长公이고, 西晉의 史学家이다. 처음에는 令史가 되었고, 후에 任襄阳令으로 나갔다. 干宝ㆍ孙盛 등이 ≪晉书≫를 편찬할 때 이 책에서 인용하였고, 裴松之가 ≪三国志≫의 注를 낼 때도 이 책의 일부를 인용하였다.
역주2 : 저본에는 ‘揷’으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 등에는 ‘鍤’으로 되어 있다.
역주3 土木形骸 : 형체를 흙이나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두고 전혀 꾸미지 않음을 이른 말이다. ≪晉書≫ 〈嵇康傳〉에, 혜강은 “풍채가 있었으나 육체를 토목처럼 여겨 스스로 꾸미지 않았다.[有風儀而土木形骸 不自藻飾]”라는 말이 있다.
역주4 : ‘築’은 손으로 사람을 치는 것이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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