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人은 樂曠하고 多奇情이라 故其言語文章이 別是一色하니 世說可覩已라 說爲晉作하고 及于漢魏者는 其餘耳라 雖典雅는 不如左氏國語하고 馳騖는 不如諸國策이로대 而清微簡遠하고 居然玄勝이라
槩擧如衛虎度江과 安石教兒하면 機鋒似沉하고 滑稽又冷하여 類入人夢思하고 有味有情하여 嚥之愈多하고 嚼之不見이라
盖于時諸公은 剸以一言半句로 爲終身之目하니 未若後來人士가 俛焉下筆이라야 始定名價라
臨川
은 善述
하고 更自高簡有法
이나 反正之評
과 戾實之載
가 豈不或有
리오마는 亦當頌之
하여 使與諸書竝行也
어늘 晚後淺俗
하니 解人
을 正不可得
가
嗚呼라 人言江左清談遺事라하나 槃槃一老가 出其游戲餘力하여 尙足辦此百萬之敵하니 玆非談之宗歟아 抑吾取其文하고 而非論其人也라
丙戌長夏에 病思無聊하여 因手校家本하여 精剗其長註하고 間疏其滯義하여 明年에 以授梓하니 迺五月既望에 梓成하다 耘廬劉應登이 自書其端하여 是爲序하노라
嘗攷載記所述하니 晉人話言은 簡約玄澹하고 爾雅有韻이라 世言江左善清談이라한대 今閱新語하니 信乎其言之也라 臨川이 撰爲此書한대 採掇綜敍가 明暢不繁하고 孝標所注는 能收錄諸家小史하여 分釋其義하니 詁訓之賞이 見於高似孫緯略이라
余家藏宋本하니 是는 放翁校刊本이라 謝湖가 躬耕之暇에 手披心寄라가 自謂可觀하여 爰付梓人하여 傳之同好라
因歎昔人이 論司馬氏之祚가 亡於清談하니 斯言也無乃過甚矣乎아 竹林之儔는 希慕沂樂하고 蘭亭之集은 咏歌堯風하며 陶荊州之勤敏이요 謝東山之恬鎮이라
解莊易하여는 則輔嗣와 平叔이 擅其宗하고 析梵言하여는 則道林과 法深이 領其乘이라 或詞冷而趣遠하고 或事瑣而意奧하여 風旨各殊하고 人有興託이라
王茂弘과 祖士雅之流는 才通氣峻하고 心翼王室이 又斑斑載諸冊簡하니 是可非之者哉아 詩에 不云乎아 濟濟多士여 文王以寧이로다 余以瑯琊王之渡江에 諸賢弘贊之力爲多하니 非强說也라
夫諸晤言은 率遇藻裁하여 遂爲終身品目하니 故類以標格相高하고 玄虛成習하여 一時雅尙하니 有東京廚俊之流風焉이라 然曠達拓落하여 濫觴莫拯하여 取譏世教하니 撫卷惜之라 此於諸賢에 不無遺憾焉耳矣하노라 刻成에 序之하노라
진晉나라 사람들은
광달曠達함을 좋아하고 기이한 정취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와 문장은 색다른 특색이 있었으니 ≪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설신어≫는
진晉나라 위주로 편찬되었고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에 대한 것은 부수적일 뿐이다. 비록
전아典雅함은
좌씨左氏의 ≪
국어國語≫만 못하고 종횡무진함은
만 못하나, 깨끗하면서 은미하고 간결하면서 심원하며, 확연히 세속을 초월하였다.
과
을 예로 들어보면 기민하면서도 침착한 듯하고 해학적이면서도 냉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꿈속에서도 생각하게 하고, 맛이 있고 정취가 있어 삼키면 삼킬수록 더욱 〈그 맛이〉 풍부해지고 아무리 씹어도 〈그 정취를〉 다 알지 못하게 한다.
대체로 당시의 인사들은 오로지 한마디 말이나 짧은 구절로 일생을 품평했으니, 후대의 인사들이 부지런히 붓을 놀려 〈많이 써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값이 정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임천臨川(유의경)은 저술을 잘하였고 또 스스로 고상하고 소탈하며 법도가 있었으나, 〈이 책에〉 어찌 정도正道에 어긋난 비평과 실제에 맞지 않는 기술이 더러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칭송하여 여타의 다른 서책과 나란히 행해지게 해야 마땅하나, 후대의 습속이 천박해져서 〈이 책의 진가를〉 아는 사람을 딱히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아, 사람들은
강좌江左(
육조六朝)에서
청담淸談하느라 정사를 등한시하였다고 말하나,
이것이 담론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 문장을 취할 뿐이고 그 사람됨을 논평하지는 않겠다.
병술년丙戌年(1226) 6월에 병으로 생각이 무료해져 직접 교감한
가본家本을 토대로 긴 주석을 정밀하게 깎아내고 간간이 풀리지 않던 의미를 통하게 하여 이듬해에
재인梓人에게 주니 마침내 5월 16일에 간행하게 되었다.
운려耘廬 이 스스로 첫머리에 써서 서문을 삼노라.
내가 전에
에 기술된 것을 보니
진晉나라 사람의 일화와 대화는 간결하고 담박하며
아정雅正하고
운치韻致가 있었다. 세간에서
강좌江左 사람들은
청담淸談을 잘하였다고 말하는데 지금 ≪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열람해보니 참으로 그 말과 같다.
임천臨川(
유의경劉義慶)이 이 책을 편찬하였는데 일화를 선별하고 종합한 것이 분명하고 번잡하지 않으며,
유효표劉孝標의
주注는
제가諸家의
소사小史들을 수록하여 그 뜻을 분석하였으니, 그 훈고에 대한 칭찬이
의 ≪
위략緯略≫에 실려 있다.
우리 집안에 보관된
송본宋本은
이 교감하여 간행한 본인데, 나
사호謝湖(
원경袁褧)가 농사짓는 틈틈이 직접 열람하면서 마음을 붙이다가 스스로 볼만하다고 생각하여
재인梓人에게 맡겨 함께 즐길 거리로 전하게 되었다.
나는 옛사람들이
사마씨司馬氏(
진晉나라)의
국통國統이
청담淸談으로 인해 망했다고 논한 것에 대해 탄식하니, 이 말은 지나치게 심한 말이 아닌가.
는
을 사모하였고
에서는
요堯임금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노래하였으며,
는 근면하고 기민하며
은 조용하며 진중하였다.
≪
장자莊子≫와 ≪
주역周易≫을 해석하는 데는
와
이
종주宗主를 차지하였고, 부처의 말을 분석하는 데는
과
이
불단佛壇을 이끌었다. 혹은 말은 냉정하나 취지는 심원하며 혹은 일은 자잘하나 의미는 심오하여
풍지風旨가 각기 다르고 사람마다
흥취興趣가 있었다.
과
의 무리는
재기才氣가 빼어났고, 그들이 마음을 다해 왕실을 도왔던 자취가 여러 서책에 여기저기 실려 있으니 어찌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
시경詩經≫ 〈
대아大雅 문왕文王〉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많고 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때문에 평안하도다.” 나는
여러
현사賢士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니, 이는 억지가 아니다.
담화談話는 대부분 화려한 수식이 더해져 마침내 평생의
품평品評이 되었으므로 품평으로 서로를 높여주었고,
현원玄遠하고
허무虛無함을 추구하는 풍조가 습속을 이루어 당대에 극히 숭상을 받았으니
이 있었다. 그러나
활달豁達하고
방탕放蕩함이 도를 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세교世敎(유교)의 비난을 받았으니 이 책을 어루만지며 〈그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현사賢士에게 유감이 없을 수 없다. 판각이 완성되어 서문을 쓰노라.
가정嘉靖 을미년乙未年(1535)
입추일立秋日에
오군吳郡의
이 짓다.
注
◦ 이지李贄:〈사마씨의 국통이 청담으로 인해 망했다는 말은〉 어찌 반드시 이와 같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