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士言深好奕棋
러니 王處叔
注+① 晉書曰 “王隱, 字處叔, 陳郡陳人. 世寒素. 父銓少好學, 有著述之志, 每私錄晉事及功臣行狀, 未就而卒. 隱以素自守, 不交勢援, 博學多聞, 受父遺業, 西都舊事, 多所諳究. 家貧無資, 依征西將軍庾亮於武昌, 亮供其紙筆. 書成, 詣闕上之. 隱雖好著述, 而文辭鄙拙, 蕪舛不倫. 其書次第可觀者, 皆父所撰, 文體混漫, 義不可解者, 隱之作也.”謂之曰
禹
는 惜寸陰
注+② 帝王世紀曰 “禹有聖德, 堯命以爲司空, 繼鯀治水. 乃勞身涉勤, 不重徑尺之璧, 而愛日之寸陰.”하고 不聞數棋
라하니
古人은 遭時則以功達其道하고 不遇則以言達其才라 故否泰不窮也라 今晉未有書而天下傾覆하여 舊事蕩滅이라 君少長王都하고 游宦四方하여 華夷成敗가 皆在耳目이니 何不記述하여 使有裁成가
昔
에 應仲遠
은 作風俗通
注+③ 漢藝文志曰 “應劭篤學多聞, 撰風俗通, 以辯物名號, 釋時嫌疑.”하고 崔子眞
은 作政論
注+④ 後漢書曰 “崔寔, 字子眞, 少沈靜, 好典籍, 以郡擧徵詣公車, 除爲郞. 論當世事數十條, 名爲政論, 指切時要, 言辯而確, 當世稱之. 仲長統曰 ‘凡爲人主, 宜寫一通, 置之坐側.’”하고 蔡伯喈
는 作勸學篇
注+⑤ 後漢書曰 “邕所著獨斷․勸學․釋誨․詩賦․碑誄, 凡百四篇傳於世.”
唐藝文志小學類, 有蔡邕勸學篇一卷.하고 史游
는 作急就章
注+⑥ 漢書注曰 “游, 元帝時爲黃門令. 凡書三十二章, 雜記姓名․諸物․五官等字, 以敎童蒙. 急就者, 謂字之難知者, 緩急可就而求焉.”이니 便爲沒而不朽
라 當其同時
하여 人豈少哉
리오마는
而皆無聞
은 由無所述也
라 故
로 君子疾沒世而名不稱
이라 況國史
는 明乎得失之迹
이니 何必博奕而後忘憂哉
注+⑦ 리오하다
20-1
조사언祖士言(
조납祖納)은 바둑을 몹시 좋아했다.
왕처숙王處叔(
왕은王隱)이
注+① ≪진서晉書≫에 말했다. “왕은王隱은 자字가 처숙處叔으로 진군陳郡 진현陳縣 사람이다. 대대로 한미하였다. 부친 은전隱銓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저술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매번 사적으로 진晉나라의 일과 공신功臣의 행장行狀을 기록하였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왕은은 유학儒學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지키고 권세가와 교유하지 않았으며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부친이 남긴 사업을 이어받았는데 서도西都(낙양洛陽)의 옛일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많았다. 집이 가난해 〈책을 만들〉 물자가 없었기에 무창武昌에서 정서장군征西將軍 유량庾亮에게 의탁하였고, 유량이 그에게 종이와 붓을 공급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대궐로 가서 바쳤다. 왕은은 비록 저술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장이 비루하고 졸렬하며 거칠고 너저분하여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했다. 그 책에서 반듯하고 볼만한 것은 모두 그의 부친이 지은 것이고, 문체가 난잡하고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왕은이 지은 것이다.” 그에게 말했다.
“옛날
우禹임금은
촌음寸陰도 아까워하였고,
注+②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말했다. “우禹에게 훌륭한 덕성이 있었는데 요堯임금이 명을 내려 사공司空으로 삼고 〈그의 부친인〉 곤鯀을 이어 치수治水하도록 하였다. 이에 직접 애를 쓰면서 돌아다니며 일했는데 직경이 한 자가 되는 벽옥璧玉을 중히 여기지 않고 촌음寸陰을 아꼈다.” 바둑을 두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옛사람들은 때를 만나면 공功을 세워 자신의 이상을 펼치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말로써 자신의 재주를 펼쳤습니다. 그러므로 운수가 막히든 터지든 곤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진晉나라에는 사서史書가 없는데 천하天下가 뒤집어져 옛일들이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대는 젊어서부터 왕도王都에서 자라고 사방에서 벼슬살이를 하여 중국과 이민족의 성공과 패배를 모두 보고 들을 것인데, 어찌하여 〈그 일들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까.
옛날
응중원應仲遠(
응소應邵)은 ≪
풍속통風俗通≫을 지었고
注+③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말했다. “응소應劭는 학문에 전념하고 많은 견문을 쌓았다. ≪풍속통風俗通≫을 지어 사물의 이름에 관해 변증하고 당시의 의심스럽고 알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밝혔다.” 최자진崔子眞(
최식崔寔)은 〈
정론政論〉을 지었고
注+④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최식崔寔은 자字가 자진子眞으로 젊어서부터 차분하고 조용했으며 전적典籍을 좋아하였다. 군郡의 천거로 에 불려가 낭郞이 되었다. 당세當世의 일 수십 건에 대해 논하고 이름을 〈정론政論〉이라고 하였는데, 정곡을 정확히 지적하고 말이 명료하고 적확해 당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중장통仲長統은 ‘무릇 임금이라면 한 통씩 베껴서 자리 옆에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채백개蔡伯喈(
채옹蔡邕)는 ≪
권학편勸學篇≫을 지었고
注+⑤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채옹蔡邕이 지은 ≪독단獨斷≫․≪권학勸學≫․≪석회釋誨≫․시詩와 부賦․비문과 뢰사誄詞 등 모두 104편이 세상에 전한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 소학류小學類〉에 채옹의 ≪권학편勸學篇≫ 1권이 있다고 하였다. 사유史游는 ≪
급취장急就章≫을 지었는데
注+⑥ 에 말했다. “사유史游는 원제元帝(유석劉奭) 때 이 되었다. ≪급취장急就章≫은 모두 32장으로, 사람의 성명姓名․사물들․모든 관직 등에 나오는 글자를 잡다하게 기록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급취急就’란 알기 어려운 글자를 급할 때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죽었어도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인물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알려지지 않았으니 저술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국사國史는
득실得失의 자취를 밝히는 일인데 어찌 굳이 바둑을 두고 난 뒤라야 근심을 잊는다는 말입니까.”
注+⑦ 조사언祖士言이 마침내 편지를 보내 왕은王隱이 국사를 편찬하도록 추천하였다. 황제가 〈이 일을〉 종아鍾雅에게 물어보았으나 〈종아의 반대로〉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