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고좌도인髙坐道人(시려밀尸黎密)은 한어漢語를 쓰지 않았는데,注+① 〈고좌별전高坐別傳〉에 말하였다. “화상和尙은 원래 이름이 시려밀尸黎密(백시려밀다라帛尸黎密多羅)이고 서역西域 사람이다. 전하는 말로는 〈구자국龜玆國〉 국왕의 아들로 나라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마침내 사문沙門이 되었다고 한다. 영가永嘉 연간(307~312)에 처음 이 땅에 도착했고 큰 저잣거리에 머물렀다. 화상은 타고난 자질이 고명高明하였고 기풍이 굳세었다. 승상丞相왕공王公(왕도王導)이 한번 보고는 특별하게 생각하여 자기와 같은 부류라고 여겼다. 주복사周僕射(주의周顗)는 관리를 천거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화상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런 어진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라며 감탄하였다. 얼마 뒤에 주후周侯(주의)가 해를 당하자 화상이 그의 영전에서 서역말로 축원 수천 자를 읊었는데 그 소리가 높게 울렸다. 마치고 나서 눈물을 흩뿌리고는 〈금세〉 거두었다. 슬픔과 기쁨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모두 이러하였다. 성품은 고상하고 소탈했으며 진晉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와 말할 때에 모두 통역을 통했지만 문득 말하기 전에 마음으로 알아차렸다.”
를 행하였는데 매강梅岡에서 죽자 바로 그곳에 장사 지냈다. 진晉원제元帝(사마예司馬睿)가 무덤 옆에 절을 세우고 ‘고좌사高坐寺’라고 이름하였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묻자 진晉간문제簡文帝(사마욱司馬昱)가 말했다.
“응대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이다.”注+②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진晉간문제簡文帝는 휘諱가 욱昱이고 자字가 도만道萬으로 중종中宗(원제元帝사마예司馬睿)의 막내아들이다. 인자함으로 이름이 났고 지혜와 기량이 있었다. 진晉목제穆帝(사마담司馬聃)가 어려서 무군撫軍으로서 정사를 보필하였다. 대사마大司馬환온桓溫이 해서공海西公(사마혁司馬奕)을 폐위하고 황제로 옹립하였다. 2년간 재위하였다.”
역주1塔寺記 :
≪新唐書≫ 〈藝文志〉 등에 의하면 지은이는 승려인 淸徹 또는 淸澈이며 36권이며 ≪金陵塔寺記≫가 정식 명칭이고 金陵, 즉 지금의 南京 지역의 불교 유적에 관한 기록으로 보인다.
역주2頭陀 :
속세의 번뇌를 떨쳐버린다는 뜻이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탁발하는 일 또는 그렇게 하는 승려를 가리킨다.
역주3冢 :
≪世說新語箋疏≫에서는 景宋本에 ‘宋’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으며, ‘宋曰’은 ‘漢曰’이나 ‘晉曰’과 마찬가지로 중국어로 서역의 말을 번역하는 것을 이른다고 하였다. 이럴 경우 ‘尸黎密, 宋曰高坐’가 되는데, 뜻은 ‘尸黎密을 송나라에서는 高坐라고 한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