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東亭
은 與張冠軍
으로 善
注+① 續晉陽秋曰 “張玄之, 字祖希, 吳郡太守澄之孫也. 少以學顯, 歴吏部尙書, 出爲冠軍將軍․吳興太守․會稽. 謝玄同時之郡, 論者以爲南北之望. 玄之名亞謝玄, 時亦稱南北二玄, 卒於郡.”이러니 王
이 旣作吳郡
에 人問小令曰
注+② 續晉陽秋曰 “王獻之爲中書令, 王珉代之, 時人謂 ‘大小王令’.” 珉別傳曰 “珉, 字季琰, 瑯琊人. 丞相導孫, 中領軍洽少子. 有才藝, 善行書. 名出兄珣右. 累遷侍中․中書令, 贈太常.”
6-22
왕동정王東亭(
왕헌지王獻之)은
장관군張冠軍(
장현지張玄之)과 친하였다.
注+①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장현지張玄之는 자字가 조희祖希이고, 오군태수吳郡太守 장징張澄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쳤으며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관군장군冠軍將軍․오흥태수吳興太守․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냈다. 사현謝玄과 같은 시기에 〈태수가 되어〉 군郡으로 나갔는데, 논자論者들이 그들을 ‘남북의 명망名望’이라고 하였다. 장현지의 명망이 사현에 버금가니 당시에 그들을 ‘남북이현南北二玄’이라고도 불렀다. 〈재직하던〉 군郡에서 죽었다.” 왕동정이
오군태수吳郡太守가 되고 난 뒤 어떤 사람이
소령小令(
왕민王珉)에게 물었다.
注+②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왕헌지王獻之가 중서령中書令이었는데 왕민王珉이 그 후임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대왕령大王令’, ‘소왕령小王令’이라 하였다.”
〈왕민별전王珉別傳〉에 말하였다. “왕민王珉은 자字가 계염季琰이고 낭야瑯琊 사람이다. 승상 왕도王導의 손자이고 중령군中領軍 왕흡王洽의 작은 아들이다. 재예才藝가 있었고 행서行書를 잘 썼다. 명망이 형인 왕순王珣보다 더 높았다. 시중侍中․중서령中書令을 두루 거쳤으며 태상太常에 추증되었다.”
“동정東亭(왕헌지)이 태수가 되었는데 교화와 치적治積이 어떠한가?”
“백성을 얼마나 잘 교화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장조희張祖希(장현지)와의 우정만은 나날이 돈독해지고 있습니다.”
注
◦ 왕세무王世懋:이것은 형을 사랑하는 말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