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陽宗世林은 魏武同時어늘 而甚薄其爲人하여 不與之交라 及魏武作司空하여 總朝政할새 從容問宗曰
世林
은 旣以忤旨見疎
하여 位不配德
이로되 文帝兄弟
는 每造其門
에 皆獨拜牀下
하니 其見禮如此
注+① 楚國先賢傳曰 “宗承, 字世林, 南陽安衆人. 父資, 有美譽. 承少而修德雅正, 确然不群, 徵聘不就, 聞德而至者如林. 魏武弱冠, 屢造其門, 値賓客猥積, 不能得言. 乃伺承起, 往要之, 捉手請交, 承拒而不納. 帝後爲司空, 輔漢朝, 乃謂承曰 ‘卿昔不顧吾, 今可爲交未?’ 承曰 ‘松柏之志猶存.’ 帝不說, 以其名賢, 猶敬禮之, 勅文帝修子弟禮, 就家拜漢中太守. 武帝平冀州, 從至鄴, 陳群等皆爲之拜, 帝猶以舊情介意, 薄其位而優其禮, 就家, 訪以朝政, 居賓客之右. 文帝徵爲直諫大夫, 明帝欲引以爲相, 以老固辭.”하다
10-8 남양南陽 사람 종세림宗世林(종승宗承)은 위魏(삼국三國) 무제武帝(조조曹操)와 동시대 사람이었는데, 무제의 사람됨을 매우 우습게 보아 그와 교유하지 않았다. 위무제가 사공司空이 되어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게 되었을 때, 차분하게 종세림에게 물었다.
종세림은 이미 〈무제의〉 뜻에 거슬려 소원해졌기 때문에 그 지위가 그 덕망에 걸맞지 못했으나,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형제는 매번 그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 모두 그의
좌상座牀 아래에서
독배獨拜했으니, 그가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注+① 의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에 말하였다. “종승宗承은 자字가 세림世林으로, 남양南陽 안중安衆 사람이다. 부친 종자宗資는 훌륭한 명성을 지녔다. 종승은 어릴 때부터 덕성을 함양하여 전아典雅하고 순정純正하였으며, 꿋꿋한 태도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조정에서〉 초빙해도 나아가지 않으니, 〈그의〉 덕망德望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숲처럼 많았다. 위魏(삼국三國) 무제武帝(조조曹操)가 약관弱冠의 나이에 여러 번 그의 집에 찾아갔는데, 번번이 빈객이 매우 많아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종승이 일어날 때를 엿보고는 가서 기다렸다가 손을 잡고 교유를 요청했으나, 종승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제가 이후에 사공司空이 되어 한漢나라 조정을 보좌하게 되자, 종승에게 ‘그대는 옛날에는 저를 돌아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교유할 수 있습니까?’ 하니, 종승이 ‘송백松柏의 지조가 여전이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무제가 불쾌했으나, 그가 저명한 현자였기 때문에 여전히 존경하고 예우하며, 문제文帝(조비曹丕)에게 명하여 자제子弟의 예를 갖추어 그의 집에 나아가 한중태수漢中太守를 제수하게 하였다. 이어서 〈기주의 중심지인〉 업성鄴城에 이르자, 진군陳群 등이 모두 무제에게 절을 하였다. 무제는 여전히 〈종승에 대해〉 옛날 정의情誼가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지위는 낮게 했으나 그 예우는 융숭하게 하고, 그의 집에 찾아가 조정의 〈대소사를〉 물으며, 빈객의 상석에 자리하게 하였다. 문제는 〈그를〉 초빙하여 직간대부直諫大夫로 삼았고, 명제明帝(조예曹叡)는 〈그를〉 초빙하여 승상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노년이라는 이유로 완강히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