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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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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子許注+① 先賢行狀曰 “衛玆, 字子許, 陳留襄邑人. 不爲詭激之行, 不徇流俗之名, 明慮淵深, 規略宏遠. 爲車騎將軍何苗所辟. 司徒楊彪再加旌命. 漢室傾蕩, 曹公到陳留, 與玆相見, 同議起兵, 玆曰 ‘亂生久矣, 非兵無以整之.’ 由是首讚洪謀, 從太祖入滎陽, 力戰終日, 失利而歿.”弱冠 與同郡圏文生으로 同稱盛德이라 郭林宗 與二人으로 俱到市러니 子許 買物 隨價讐直하고 文生 訿呵하여 減價乃取하니 林宗曰
子許 少欲이요 文生 多情이라 此二人 非徒兄弟 乃父子也라하다
文生 以穢貨 見捐하고 子許 以烈節 致譽注+② 如此看人, 尙在皮毛.


14-4 注+에 말하였다. “위자衛玆자허子許이고, 진류陳留 양읍襄邑 사람이다. 남을 속이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포부가 분명하고 생각이 깊었다. 거기장군 하묘何苗에게 초빙되었고 사도 양표楊彪가 재차 을 보냈다. 나라가 기울어 위태로울 때 조공曹公(조조曹操)이 진류에 이르러 위자와 서로 만나 함께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는데, 위자가 말하기를, ‘난리가 일어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군대가 아니면 어떻게도 이를 평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큰 계획에 앞장서 참여하여 태조(조조)를 따라 형양滎陽에 들어가 종일토록 힘써 싸우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스무 살 무렵에 같은 사람인 권문생圏文生과 함께 덕이 높은 사람으로 불렸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시장에 갔는데, 위자허는 물건을 살 때 값에 따라 온전한 값을 주었고, 권문생은 비싸다고 나무라며 값을 깎아서 샀다. 곽임종이 말하였다.
곽태郭泰곽태郭泰
이 두 사람은 단지 형과 아우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격이다.”
나중에 권문생은 탐오貪汚로 인해 버림을 받았고, 위자허는 훌륭한 절개로 명예를 얻었다.注+② 이와 같이 사람을 보는 것은 오히려 표면적이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가 아닌 ≪何氏語林≫에 있으므로 ‘補’를 보충하였다.
역주2 衛子許(衛玆) : ? ~ 190. 동한 말기의 인물로, 字는 子許이며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세속의 명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역주3 先賢行狀 : 汉代末에서 三国时期까지의 历史人物의 言行과 事迹을 기록한 서적으로, 오늘날의 行狀 문체의 맹아가 된 서적이다. 裴松之가 ≪三国志≫ 注를 낼 때 상당 부분을 이 책에서 인용하였다.
역주4 旌命 : 旌은 깃발의 종류인데, ≪孟子≫ 〈滕文公 下〉에 “大夫를 부를 때는 旌을 사용한다.[招大夫以旌]”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현자를 구하러 가는 使者는 旌으로써 군주의 증표를 삼는다. 여기서는 군주가 위자를 초빙하는 사자를 보냈다는 의미이다.(≪世說音釋≫)
역주5 郭林宗(郭泰) : 128~169. 字는 林宗이고 太原郡 界休県 사람이다. 당시 名儒인 八顧 중 한 사람이다. ≪後漢書≫에서는 편찬자인 范曄이 자기 부친의 이름(范泰)을 諱하기 위해 그를 ‘郭太’ ‘郭林宗’으로 표기하였다.(≪後漢書≫ 〈郭林宗傳〉)
역주6 위자허는……많다 : 욕심이 적으면 미덥고 미더우면 성공하며, 감정이 많으면 거짓되고 거짓되면 실패한다.(≪世說講義≫)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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