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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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阮光祿 赴山陵하여 至都한대 不往殷․劉許하고 過事便還이라 諸人 相與追之어늘 亦知時流必當逐己하고 乃遄疾而去하니 至方山 不相及注+① 中興書曰 “裕終日頹然, 無所綜, 而物自宗之.”이라
劉尹 時爲會稽러니 乃歎曰
我入이면 當泊安石渚下耳 不敢復近思曠傍이라 伊便能捉杖打人이나 不易로다하다
【頭註】
劉云 “更無倫理.”
劉云 “安石渚, 會稽地名.”


11-25 원광록阮光祿(원유阮裕)이 산릉山陵에 참석하려고 도성(건강建康)에 도착했는데, 유담劉惔이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은 채 일을 마친 뒤에 즉시 돌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그를〉 뒤쫓아 갔지만, 〈완광록은〉 이미 역시 시류時流(세속의 무리)들이 틀림없이 자신을 뒤쫓아 올 것을 알고는 서둘러 갔기 때문에 〈뒤쫓던 자들이〉 에 이르도록 따라 잡지 못하였다.注+하법성何法盛의 ≪진중흥서晉中興書≫에 말하였다. “원유阮裕는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쓰러져 있은 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바가 없었으나, 사람들이 저절로 그를 종주로 삼았다.”
당시 회계태수會稽太守 유윤劉尹(유담)이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회계 경내로〉 들어간다면 마땅히 사안석謝安石(사안謝安)이 있는 강가에 배를 댈 뿐이고, 감히 더 이상 원사광阮思曠(완유)의 곁에는 가까이 갈 수 없겠지. 〈가까이 가면〉 그가 즉시 막대기를 들고 나를 때릴 수 있겠지만, 〈때리는 것이〉 이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원유阮裕의 행동은〉 전혀 윤리가 없다.
유신옹劉辰翁:〈본문의〉 안석저安石渚회계군會稽郡의 지명이다.


역주
역주1 國喪 : ≪世說音釋≫과 ≪世說箋本≫에서는 簡文帝(司馬昱, 320~372)가 붕어했다고 하고, ≪世說補考≫에서는 成帝(司馬衍, 321~342)가 붕어했다고 했는데, 이 일화에 등장하는 殷浩의 생몰년이 303~356년이기 때문에 ≪세설보고≫의 견해가 옳다. 성제는 咸康 8년(342) 6월에 세상을 떠났고, 7월에 興平陵에 장례를 치렀다.
역주2 殷浩 : 303~356. 陳郡 長平 사람으로, 字는 深源이다. 젊을 때부터 식견과 도량으로 명성이 높았고, 숙부 殷融과 함께 ≪老子≫․≪易經≫에 심취하였으며 담론에 뛰어났다. 晉나라 建武將軍과 揚州刺史를 역임했고, 북벌전쟁을 수행하다가 실패하여 庶人으로 폐해졌다가 病死하였다.
역주3 方山 : 建康의 동남쪽에 있는 天印山이다.
역주4 쉽지 않을 것 : 원문의 ‘不易’에 대하여 ≪世說音釋≫에서는 “내가 감당하기 쉽지 않다.” 하였고, ≪世說啓微≫와 ≪世說講義≫에서는 “내가 安石渚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때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했는데, 후자의 견해를 따랐다. ≪世說箋本≫에서는 衍文이라고 하였다.
역주5 : 安永本과 ≪世說箋本≫에는 ‘阮’으로 되어 있다.
역주6 (錯)[修] : 저본에는 ‘錯’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 〈阮裕列傳〉에 의거하여 ‘修’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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