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元禮는 一世龍門이라 時에 同縣聶季寶는 小家子라 不敢見元禮러니 杜周甫가 知季寶賢이로대 不能定名하여 以語元禮하니 元禮呼見하여 坐置砌下牛衣上하고 一與言하얀 即決曰
後卒如元禮言
注+① 范曄後漢書曰 “杜密, 字周甫, (頴)[潁]川考城人. 少有厲俗志. 爲胡廣所辟, 桓帝徵拜尙書令. 黨事起, 與李膺俱坐, 而名行相次, 時人稱李․杜.”이라
14-2 【
보補】
는 당대의
이었다. 당시에 같은 현에 사는
섭계보聶季寶는 가난한 집 자식이라 감히 이원례를 만날 수 없었다.
두주보杜周甫(
두밀杜密)는 섭계보가 어질다는 것은 알았으나 〈품평하는〉 명칭을 정하지 못해 이원례에게 말하였다. 이원례가 섭계보를 불러 만나서 섬돌 아래
위에 앉혀놓고 한 번 대화해 보고는 즉시 판정하였다.
이응李膺
후에 결국 이원례의 말처럼 되었다.
注+①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두밀전杜密傳〉에 말하였다. “두밀杜密은 자字가 주보周甫이고, 영천潁川 고성考城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세속世俗을 북돋우려는 뜻을 지녔다. 호광胡廣의 부름을 받았고 환제桓帝가 초빙하여 상서령에 임명하였다. 가 일어났을 때 이응李膺과 함께 연루되었는데 명성과 행위가 서로 버금가서 당시 사람들이 그들도 ‘이두李杜’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