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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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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莊子者 數十家어늘 莫能究其旨要 向秀注+① 向秀別傳曰 “秀, 字子期, 河內人. 少爲同郡山濤所知, 又與譙國嵇康․東平呂安友善, 竝有拔俗之韻. 其進止無不同, 而造事營生, 業亦不異, 常與嵇康偶鍛於洛邑, 與呂安灌園於山陽, 不慮家之有無, 外物不足怫其心. 弱冠著儒道論, 棄而不錄, 好事者或存之. 或云 ‘是其族人所作, 困於不行, 乃告秀欲假其名. 秀笑曰 「可復爾耳.」’ 後康被誅, 秀遂失圖, 乃應歲擧, 到京師, 詣大將軍司馬文王. 文王問曰 ‘聞君有箕山之志, 何能自屈.’ 秀曰 ‘常謂彼人不達堯意, 本非所慕也.’ 一坐皆說. 隨次轉, 至黃門侍郞․散騎常侍.” 於舊注外 爲解義하니 析奇致하여 大暢玄風注+② 秀別傳曰 “秀與嵇康․呂安爲友, 趣舍不同. 嵇康傲世不羈, 安放逸邁俗, 而秀雅好讀書, 二子頗以此嗤之. 後秀將注莊子, 先以告康․安, 康․安咸曰 ‘此書詎復須注. 徒棄人, 作樂事耳.’ 及成, 以示二子, 康曰 ‘爾故復勝不.’ 安乃驚曰 ‘莊周不死矣.’ 後注周易, 大義可觀, 而與漢世諸儒互有彼此, 未若隱之絶倫也.” 秀本傳 “或言秀遊託數賢, 蕭屑卒歲. 都無著述, 惟好莊子, 聊應崔譔所注, 以備遺忘云.” 竹林七賢論云 “秀爲此義, 讀之者無不超然, 若已出塵埃而窺絶冥, 始了視聽之表有神德玄哲, 能遺天下外萬物. 雖復使動競之人顧觀所徇, 皆悵然自有振拔之情矣.”이로되 惟秋水 至樂二篇 未竟而秀卒이라 秀子幼하여 義遂零落이나 然猶有別本이라
郭象者 爲人薄行이나 有儁才注+③ 文士傳曰 “象, 字子玄, 河南人. 少有才理, 慕道好學, 託志老․莊, 時人咸以爲王弼之亞. 辟司掾․太傅主簿.” 見秀義不傳於世하고 遂竊以爲己注 乃自注秋水 至樂二篇하고 又易馬蹄一篇하니 其餘衆篇 或定點文句而已注+④ 文士傳曰 “象作莊子注, 最有淸辭遒旨.” 秀義別本出하니 故今有向郭二莊이나 其義一也
【頭註】
李云 “向秀如此, 似負嵇公.”


8-19 애초에 ≪장자莊子≫를 주해한 사람이 수십 명이었으나 아무도 그 핵심을 구명할 수 없었다. 상수向秀注+① 〈향수별전向秀別傳〉에 말하였다. “상수는 자기子期로, 하내河內 사람이다. 젊을 때 같은 군의 산도山濤에게 인정받고, 또 초국譙國혜강嵇康, 동평東平여안呂安과 사이가 좋았는데, 이들은 모두 탈속의 운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나아가거나 물러날 때도 항상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며, 일을 하여 생계를 꾸리는 것도 이미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항상 혜강과 짝을 이루어 낙읍洛邑에서 강철을 주조하고 여안과 함께 산양山陽에서 정원에 물을 주면서 〈생계를 꾸리되〉 집안의 살림살이를 염려하지 않았으니, 외물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유도론儒道論〉을 지었으나 버리고 거두지 않았는데 호사자가 간혹 그것을 보존하였다. 혹자는 ‘이 논문은 상수의 친척이 지은 것인데 유통되지 않는 것을 곤란하게 여기고는 상수에게 이름을 빌리고 싶다고 하자, 상수가 웃으면서 「좋도록 하시오.」 했다.’ 하였다. 이후에 혜강이 죽임을 당하자 상수는 결국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해마다 치르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에 가서 대장군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司馬昭)을 찾아 갔다. 문왕이 ‘듣자니, 그대는 을 품고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스스로 굴복할 수 있소?’ 묻자, 상수가 ‘〈저는〉 항상 허유許由임금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니 본래 사모한 바가 아닙니다.’ 하니, 좌중의 모든 사람이 기뻐하였다. 차례에 따라 관직을 옮겨 황문시랑黃門侍郞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옛 주석 이외에 해의解義를 지었는데, 오묘한 분석과 참신한 의미가 현담玄談의 풍조를 크게 창달하였다.注+② 〈향수별전向秀別傳〉에 말하였다. “상수는 혜강嵇康여안呂安과 벗이었지만 취사선택은 같지 않았다. 혜강은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여안은 제멋대로 굴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그러나 상수가 항상 독서를 좋아하니, 혜강과 여안이 이로써 적지 않게 그를 비웃었다. 이후에 상수가 장차 ≪장자莊子≫를 주해하고자 하여 우선 이 일을 혜강과 여안에게 알렸더니, 혜강과 여안은 모두 ‘이 책이 어찌 더 이상 주석이 필요하겠는가. 그 일은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버려두고 즐거운 일을 할 뿐일세.’ 하였다. 주해가 완성되었을 때 두 사람에게 보여주자, 혜강이 〈여안에게〉 ‘그대는 진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여안이 깜짝 놀라면서 ‘장주莊周가 죽지 않았구나.’ 하였다. 이후에 ≪주역周易≫을 주해했는데 그 요지는 볼만 했지만, 나라 여러 유학자들의 해설과 일치하지 않으니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뛰어나게 은미한 뜻을 탐색하고 원활하게 풀이한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향수본전向秀本傳〉에 말하였다. “혹자는 ‘상수가 유람을 하면서 여러 현자에게 의탁하다가 처량하게 세상을 떠났다. 저술은 전혀 남기지 않고, 오직 ≪장자≫를 좋아하여 애오라지 이 주해한 내용을 수용하여 잊을 것에 대비했다.’ 하였다.”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말하였다. “상수가 이 해의解義를 지었을 때,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세속을 벗어나게 되었으니, 마치 먼지 낀 세속을 이미 벗어나 지극히 심오한 부분을 엿보아 비로소 보고 듣는 세계 바깥에 신묘한 덕과 현묘한 철리哲理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천하를 버리고 만물을 도외시할 수 있을 듯하다. 비록 다시 명리名利를 찾느라 분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쫒는 바를 돌아보게 할지라도 모두 이전의 행위를 슬프게 여기면서 속세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될 것이다.”
다만 〈추수秋水〉와 〈지락至樂〉 두 편은 주해를 끝내지 못한 채 상수가 세상을 떠났다. 상수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그의 해의가 마침내 산실散失되었지만, 그래도 별본別本은 있었다.
곽상郭象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경박했으나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注+의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곽상郭象자현子玄으로, 하남河南 사람이다. 젊을 때 재주와 사상을 지니고, 도를 사모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노장老莊에 뜻을 두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왕필王弼에 버금간다고 여겼다. 사공연司空掾태부주부太傅主簿로 발탁되었다.” 상수의 해의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것을 표절하여 자신의 주석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추수〉와 〈지락〉 두 편에 주석을 달고, 또 〈마제馬蹄〉 한 편의 주석을 개정하며, 그 나머지 여러 편에 대해서는 간혹 문구를 수정했을 뿐이었다.注+장즐張騭의 ≪문사전文士傳≫에 말하였다. “곽상이 ≪장자주莊子注≫를 지었는데, 청아한 표현과 뛰어난 의미가 매우 많이 담겨 있다.” 이후에 상수가 지은 해의의 별본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에 현재는 상수가 주해한 ≪장자≫와 곽상이 주해한 ≪장자≫가 있게 되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
두주頭註
이지李贄 혜공嵇公(혜강嵇康) 공을 배반한 듯하다.


역주
역주1 箕山의 뜻 : 기산은 河南省 登封縣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許由가 은거했던 곳이다. 허유는 堯임금 때의 隱士로, 요임금이 천하를 그에게 양위하려 하자 기산 아래 穎水 북쪽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九州의 우두머리로 삼으려고 하자 영수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莊子≫ 〈逍遙遊〉, ≪史記≫ 〈燕世家〉)
역주2 崔譔(최찬) : 東晉시대 사람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莊子≫ 주석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 책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그의 주석이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남아 있다. ≪世說音釋≫에서 ‘譔’의 발음은 ‘撰’이라고 하였다.
역주3 張騭(장즐) : ≪晉書≫ 〈載記〉에 “東晉 孝武帝 隆安 5년(401)에 房晷와 梁中庸을 左長史와 右長史로 삼았고, 張騭과 謝正禮를 左司馬와 右司馬로 삼았다.[房晷梁中庸爲左右長史 張騭謝正禮爲左右司馬]” 하였고, 余嘉錫은 “장즐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裴松之와 劉孝標가 모두 그의 ≪文士傳≫을 인용했으니 장즐은 晉代에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騭雖不詳時代 然裴松之劉孝標皆引其書 則其人當生於晉代]” 하였다.(≪世說新語箋疏≫ 〈雅量〉)
역주4 (竗)[妙] : 저본에는 ‘竗’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과 ≪世說新語≫ 각본에 의거하여 ‘妙’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5 (莊)[解] : 저본에는 ‘莊’으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과 ≪世說箋本≫에 의거하여 ‘解’로 바로잡았다. ≪세설전본≫에서는 ≪晉書≫ 〈向秀傳〉의 “莊周著內外數十篇 歷世才士雖有觀者 莫適論其旨統也 秀乃爲之隱解 發明奇趣 振起玄風 讀之者超然心悟 莫不自足一時也(莊周가 수십 편의 내편과 외편을 저술했는데, 역대로 재주 있는 선비 가운데 ≪莊子≫에 대해 비록 자신의 관점을 가진 자가 있었지만, 그 사상의 체계를 사리에 맞게 논의한 사람은 없었다. 向秀가 ≪장자≫에 대해 ≪隱解≫를 지어 기묘한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玄風(玄學의 풍조)을 크게 일으켰으니, 상수의 ≪은해≫를 읽는 자들은 얽매임 없이 마음으로 깨달아 누구나 스스로 한 때에 만족하였다.)”를 근거로 제시하였으며, ≪莊子隱解≫를 書名으로 보기도(≪全晉文≫ 권72) 한다. 萬曆 14년본과 ≪世說新語≫ 각본에는 ‘莊’으로 되어 있다.
역주6 : ≪晉書≫ 〈郭象傳〉에는 ‘徒’로 되어 있다.
역주7 向秀가……했다면 : 상수가 관직을 얻기 위해 司馬文王(司馬昭)을 만난 일을 이른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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