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介甫
가 雅愛馮道
注+① 五代史曰 “馮道, 字可道, 瀛州景城人. 初事宦者張承業, 得薦於晉王. 唐莊宗卽位, 拜戶部侍郞, 明宗時, 同中書門下平章事. 晉滅唐, 道又事晉, 加司徒․侍中. 契丹滅晉, 道又事契丹. 漢高祖立, 乃歸漢. 周滅漢, 又事周太祖, 世宗時卒. 道, 少能矯行, 以取稱於世. 當晉與粱夾河而軍, 道居軍中, 爲一茅庵, 不設牀席, 臥一束芻而已. 諸將有拉得美女者以遺, 道寘之別室, 訪其主還之. 父喪, 居景城, 歲饑, 悉出所有, 以賙鄕里, 而退耕於野, 有力不能耕者, 夜往潛爲之耕. 爲大臣, 尤務持重以鎭物. 事四姓十君, 益以舊德自處, 當世士皆仰爲元老, 而喜爲之稱譽.”하니 唐參政曰
道爲宰相하여 使朝易四姓하고 身事十主하니 此得爲純臣乎잇가하니
伊尹이 五就湯하고 五就桀者는 正在安人而巳니이다하다
介甫
가 爲之變色
注+② 東都事略曰 “唐介, 字子方, 荊南人. 爲御史裏行, 論文彦博交結宮禁, 貶英州別駕, 彦博亦罷相. 後文復相, 上言 ‘召臣, 未召介, 臣不敢行.’ 仁宗卽起介通判潭州, 尋至大用.”하다
11-42 【
보補】
가 평소에
풍도馮道를 좋아했는데,
注+① ≪신오대사新五代史≫ 〈풍도전馮道傳〉에 말하였다. “풍도는 자字가 가도可道로, 영주瀛州 경성景城 사람이다. 처음에 환관 장승업張承業을 섬겨 진왕晉王(이존욱李存勖)에게 천거될 수 있었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존욱)이 즉위한 뒤에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제수되었고, 명종明宗(이사원李嗣源) 때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후진後晉이 후당을 멸망시키자 풍도는 또 후진을 섬겼는데, 사도司徒와 시중侍中의 지위가 더해졌다. 거란契丹이 후진을 멸망시키자 풍도는 또 거란을 섬겼다. 후한後漢의 고조高祖(유지원劉知遠)가 등극하자 곧 후한에 귀의하였다. 후주後周가 후한을 멸망시키자 또 후주의 태조太祖(곽위郭威)를 섬기고 세종世宗(곽시영郭柴榮) 때에 세상을 떠났다. 풍도는 젊을 때부터 본마음을 속인 채 행동함으로써 세상에서 명성을 취하였다. 후진과 후량後粱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주둔했을 때, 풍도는 군영軍營에 거처하면서 초가집 한 채를 짓고는 침상을 두지 않은 채 건초 한 다발 위에 누웠을 뿐이었다. 여러 장수 가운데 어떤 자가 미녀를 납치하여 보내주었는데, 풍도는 그녀를 별실에 두었다가 그녀의 주인을 수소문하여 돌려보냈다. 부친상을 당하여 경성景城에 머물 때, 흉년이 들자 가진 것을 모두 꺼내어 고을 사람들을 구휼하였고, 물러나 들판에서 경작했는데 노동력은 있으나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농토가 황폐한 경우에는〉 밤에 가서 몰래 그를 위해 경작해주었다. 대신이 되어서는 자중하고 신중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더욱 힘썼다. 4개 성씨의 10명의 군주를 섬겼는데, 더욱 옛 덕행으로 자처하여 당대의 선비들이 모두 원로로 추앙하였고, 그는 그렇게 칭송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당참정唐參政(
당개唐介)이 말하였다.
“풍도는 재상이 되어 조정에서
자신은 10명의 군주를 섬겼으니, 이런 사람이 순수한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
왕안석王安石
목적은 바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었을 뿐입니다.”
왕개보가 이 말 때문에 안색이 변하였다.
注+② 왕칭王稱의 ≪동도사략東都事略≫에 말하였다. “당개唐介는 자字가 자방子方으로, 형남荊南 사람이다.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을 때 이 궁금宮禁(제왕의 비빈妃嬪)과 결탁하여 〈재상이 되었다고〉 탄핵했다가 영주별가英州別駕로 좌천되었고, 문언박도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이후에 문언박이 다시 재상에 복귀했을 때 상주하여 ‘저는 부르고 당개는 아직 부르지 않으셨으니, 저는 감히 〈재상의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인종仁宗이 즉시 당개를 담주통판潭州通判으로 기용하고 얼마 뒤에 중용重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