荀慈明
이 與汝南袁閬
으로 相見
注+① 荀爽, 一名諝. 漢南紀曰 “諝, 文章典籍, 無不涉. 時人諺曰 ‘荀氏八龍, 慈明無雙.’ 潛處篤志, 徵聘無所就.” 張璠漢紀曰 “董卓秉政, 復徵爽, 爽欲遁去, 吏持之急. 起布衣, 九十五日而至三公.”에 問(頴)[潁]川人士
라 慈明
이 先及諸兄
하니 閬
이 笑曰
昔者
에 奚
가 內擧不失其子
하고 外擧不失其讎
하니 以爲至公
注+② 春秋傳曰 “(祈)[祁]奚爲中軍尉, 請老, 晉侯問嗣焉. 稱解狐, 其讎也. 將立之而卒, 又問焉, 對曰 ‘午也可.’ 其子也. 君子謂(祈)[祁]奚可謂能擧善矣. 稱其讎不爲諂, 立其子不爲比.”이라 公旦文王之詩
에 不論堯舜之德
하고 而頌文武者
는 親親之義也
라 春秋之義
는 内其國而外諸夏
하니 且不愛其親而愛他人者
가 不為悖德乎
아하다
3-7
순자명荀慈明(
순상荀爽)이
여남汝南의
원랑袁閬과 서로 만났을 때,
注+① 순상荀爽은 순서荀諝라고도 한다. 에 말하였다. “순서는 문장文章과 전적典籍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의 속담에 ‘순씨荀氏의 팔룡八龍 중에 자명慈明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은거하며 〈학문의〉 뜻을 돈독히 하여 벼슬에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에 말하였다. “동탁董卓이 정권을 잡고 다시 순상을 불렀는데, 순상이 도망가려 하자 관리가 급히 붙잡았다. 〈벼슬 없는〉 포의布衣에서 발탁되어 95일 만에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다.” 〈원랑이〉
영천潁川의
인사人士에 대해 물어보았다. 순자명이 먼저 자신의 형들을 언급하자, 원랑이 웃으며 말했다.
“선비께서는 단지 친척과 친구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대가 저를 힐책하시는데 근거는 어떤 경전입니까?”
“금방 나라의 인재들을 물어보았는데 형들을 언급하였으니, 이 때문에 나무랐을 뿐입니다.”
“옛날
기해祁奚가 친척을 천거할 때 자신의 아들을 빠트리지 않았고, 외부 사람을 천거할 때 원수를 빠트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지극히 공정하다고 여겼습니다.
注+②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3년에 말하였다. “기해祁奚가 중군위中軍尉일 때에 연로하여 사직하겠다고 청하자, 진후晉侯가 후임을 물었다. 해호解狐를 천거했는데, 그의 원수였다. 장차 해호를 〈후임으로〉 세우려고 했는데 그가 죽어서 또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기오祁午가 좋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아들이었다. 군자君子들은 기해가 좋은 사람을 잘 추천한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원수를 천거했으나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여기지 않았고, 아들을 세웠으나 당파를 짓는다고 여기지 않았다.” 은
친친親親(자기의 친속을 친애하는 것)의 의리입니다. ≪
춘추春秋≫의 의리는 자신의 나라를 안으로 삼고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을 밖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친족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패덕悖德이 아니겠습니까?”
무왕武王 문왕文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