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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공裴成公(
배위裴頠)이 〈
숭유론崇有論〉을 지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논박했지만 아무도 〈그의 논리를〉 꺾을 수 없었고, 오직
왕이보王夷甫(
왕연王衍)가 찾아왔을 때만 〈배위가〉 약간 굴복하는 듯하였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은 왕이보가 〈주장한 ‘
무無’의〉 논리로 〈배성공의 논리를〉 논박했지만, 배성공이 〈주장한 ‘
유有’의〉 논리가 도리어 다시 펼쳐지게 되었다.
注+① 부창傅暢의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말하였다. “위魏나라 태상太常 하후현夏侯玄과 보병교위步兵校尉 완적阮籍 등으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모두 〈도덕론道德論〉을 지었다. 그때에 시중侍中 악광樂廣과 이부랑吏部郎 유한劉漢도 〈노장老莊의〉 도道를 체득하여 말이 간략하고 핵심적이었고, 상서령尙書令 왕이보王夷甫(왕연王衍)는 이치를 〈적절하게〉 강론하고 허무虛無의 논리에 뛰어났으며, 산기상시散騎常侍 대오戴奧는 〈노장의〉 도를 배우는 것을 일로 삼았고, 후배 유애庾敳의 무리는 모두 소방疏放(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방종함)과 광달曠達(도량이 넓고 마음이 활달함)을 희구하고 사모하였다. 배위裴頠는 세상에서 허무의 이치를 숭상하는 것을 미워했기 때문에 〈숭유론崇儒論〉과 〈귀무론貴無論〉 두 편의 논문을 지어 그들의 논리를 꺾었는데, 그 소재와 비유가 광범위하여 학자들이 〈제대로 그 의미와 이치를〉 궁구할 수 없었다. 이후에 악광이 배위와 한가롭게 이치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는데, 배위는 표현이 풍부하고 비유가 해박했으나 악광은 스스로 허무를 체득했다고 여겨 웃기만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육기陸機의 ≪혜제기거주惠帝起居注≫에 말하였다. “배위가 두 편의 논문을 지어 허탄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했는데, 그 문장이 논리적으로 정밀하고 내용적으로 풍부하여 한 시대의 명론名論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