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敬仁이 年十三에 作賢人論한대 長史가 送示眞長하니 眞長答云
見敬仁所作論
하니 便足參微言
注+① 脩集載其論曰 “或問 ‘易稱賢人, 「黃裳元吉」, 苟未能闇與理會, 何得不求通? 求通則有損, 有損則 「元吉」之稱, 將虛設乎?’ 答曰 ‘賢人誠未能闇與理會, 當居然人從, 比之理盡, 猶一豪之領一梁. 一豪之領一梁, 雖於理有損, 不足以撓梁. 賢有情之至寡, 豪有形之至小, 豪不至撓梁, 於賢人何有損之者哉?’”이니이다하다
注
王云 “此等論, 在今世未免撫掌, 當時所謂‘名理’乃爾, 文章一大厄也.”
9-13
왕경인王敬仁(
왕수王脩)이 13세 때에
을 지었는데, 〈그의 부친〉
왕장사王長史(
왕몽王濛)가
유진장劉眞長(
유담劉惔)에게 보내 보여주었더니, 유진장이 대답하였다.
“왕경인이 지은 논문을 보니, 즉시
미언微言(심오한 담론)에 참여하기에 충분합니다.”
注+① ≪왕수집王脩集≫에 그 논문을 싣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혹자가 물었다. ‘≪주역周易≫ 에서 현인賢人을 일컬어 했으니, 만일 〈성인聖人처럼〉 암암리에 이치에 융회관통할 수 없다면 어찌 통달하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통달하기를 구한다면 손상이 생기니, 손상이 생긴다면 「크게 길하다」라는 언표는 혹시 빈말인가?’ 왕수가 대답하였다. ‘현인賢人은 진실로 아직 이치에 암암리에 융회관통할 수 없으니, 그대로 사람이 따라가서 이치가 완벽히 구현된 수준에 미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하나의 터럭이 하나의 들보를 매달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의 터럭이 하나의 들보를 매달고 있는 것은 비록 이치에 대해 부족함이 있는 것이지만, 들보를 부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현인은 정情이 지극히 적고 터럭은 형체가 지극히 작다. 터럭이 들보를 부러뜨리는 데에 이르지 못하니, 현인에 대해 어찌 손상시킬 것이 있겠는가.’”
注
◦ 왕세무王世懋:이런 논의는 요즘 시대에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당시의 이른바 명리名理라는 것이 이와 같으니, 문장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큰 재앙이다.
注
◦ 유진옹劉辰翁:이소理所(이치가 있는 곳)에 나아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