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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숙광太叔廣은 말재주가 매우 뛰어나고
지중치摯仲治(
지우摯虞)는 글짓기에 뛰어나 모두
열경列卿(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다. 매번
공좌公坐(
조정朝廷)에 나아갔을 때 태숙광이 담론하면 지중치는 대답할 수 없었으나, 〈공좌에서〉 물러나 〈지중치가〉 문장을 써서 태숙광을 논박하면 태숙광이 또한 답변할 수 없었다.
注+①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태숙광太叔廣은 자字가 계사季思로, 동평東平 사람이다. 뒤에 〈업鄴(남경南京)에 있던 그를〉 낙양洛陽으로 보내고자 하니, 태숙광의 자손이 대부분 낙양에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자살하였다. 지우摯虞는 자字가 중치仲治로, 경조京兆의 장안長安 사람이다. 조부 지무摯茂는 수재秀才였고, 부친 지모摯模는 태복경太僕卿을 역임하였다. 지우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황보밀皇甫謐을 스승으로 섬겼다. 문장의 의미를 연구하고 고증하는 데에 뛰어나고 저술한 글이 많았으며, 비서감秘書監과 태상경太常卿을 역임하였다. 혜제惠帝(사마충司馬衷)를 따라 장안에 갔다가 결국 호현鄠縣과 두양현杜陽縣에서 떠돌아다녔다. 성품이 를 좋아하여 문적文籍을 〈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영가永嘉 5년(311)에 낙양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마침내 굶어 죽었다. 지우와 태숙광은 명성과 지위가 대체로 같았는데, 태숙광은 말재주가 좋았고 지우는 글재주에 뛰어났으나 모두 정치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은 부족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태숙광이 담론을 하면 지우는 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으나, 물러난 뒤에 〈지우가〉 문장을 써서 태숙광을 논박하면 태숙광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비웃느라 세상에 떠들썩하였다. 태숙광은 기록할 만한 내용이 없으나 지우는 저술한 바가 많으니, 이런 점에서는 〈지우가〉 더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