郗超
가 與謝玄
으로 不善
이라 苻堅
이 將
하여 旣已狼噬梁岐
하고 又虎視淮陰矣
注+① 車頻秦書曰 “苻堅, 字永固, 武都氐人也. 本姓蒲, 祖父洪詐稱讖文, 改曰苻, 言已當王應符命也. 堅初生, 有赤光, 流其室, 及誕, 背赤色隱起若篆文. 幼有美度, 石虎司隷徐正名知人, 堅六歲時, 嘗戱於路, 正見而異焉, 問曰 ‘苻郞, 此官街, 小兒行戱, 不畏縛耶?’ 堅曰 ‘吏縛有罪, 不縛小兒.’ 正謂左右曰 ‘此兒有王霸相’. 石氏亂, 伯父健及父雄, 西入關, 健夢天神使者朱衣冠, 拜肩頭爲龍驤將軍, 肩頭, 堅小字也. 健即拜爲龍驤, 以應神命. 後健僭帝號, 死. 子生立, 凶暴, 群臣殺之而立堅. 堅立十五年, 遣長樂公丕, 攻沒襄陽, 十九年大興師伐晉. 衆號百萬, 水陸俱進, 次于項城, 自項城至長安, 連旗千里, 首尾不絶. 乃遣告晉曰 ‘已爲晉君於長安城中建廣夏之室, 今故大擧渡江相迎, 入宅也.’”라 于時
에 朝議遣玄北討
한대 人間頗有異同之論
이어늘 唯超曰
是必濟事리라 吾昔嘗與共在桓宣武府일새 見使才皆盡하니 雖履屐之間이라도 亦得其任이라 以此推之컨대 容必能立勲이라하다
元功旣擧
에 時人咸歎超之先覺
하고 又重其不以愛憎匿善
注+② 中興書曰 “于時氐賊彊盛, 朝議求文武良將可鎭靖北方者, 謝大將軍安曰 ‘唯兄子玄可任此事.’ 中書郞郗超聞而嘆曰 ‘安違衆擧親, 明也. 玄必不負其擧.’”이라
注
王云 “正史堅姓從苻, 卽蒲之變也. 此云當應符命從竹, 非是.”
14-27
치초郗超는
사현謝玄과 사이가 나빴다.
부견苻堅이 장차
진晉나라를 병탄할 생각으로 이미 이리처럼
을 집어삼켰고, 또 호시탐탐
회수淮水 남쪽지역을 노리고 있었다.
注+① 차빈車頻의 ≪진서秦書≫에 말하였다. “부견苻堅은 자字가 영고永固이고, 무도武都 저氐 사람이다. 본래의 성姓은 포蒲였는데, 조부인 포홍蒲洪이 참문讖文을 사칭하여 부苻로 바꿨으니, 자신이 왕에 된다는 부명符命을 받았음을 말한 것이다. 부견이 처음 태어날 때 붉은 빛이 나타나 그 집에 흘렀고, 태어났을 때 등에 붉은 색으로 전서체篆書體를 새긴 것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태도가 있었다. 석호石虎의 사예司隷 서정徐正이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으로 이름났는데, 부견이 6세 때 길에서 놀고 있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에게 묻기를, ‘부랑苻郞, 여기는 관가官街인데 어린 아이가 놀고 있으니 잡혀가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관리는 죄 지은 자를 잡아가지 어린아이는 잡아가지 않습니다.’ 하니, 서정이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왕자王者나 패자覇者가 될 상相이 있다.’라고 하였다. 석씨石氏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백부伯父인 부건苻健과 부친 부웅苻雄이 서쪽 관문에 들어왔는데, 부건의 꿈에 붉은 옷을 입고 관을 쓴 천신天神의 사자가 견두肩頭를 용양장군龍驤將軍에 임명하였다. 견두는 부견의 어릴 때 이름이다. 부건은 즉시 그를 용양장군에 임명하여 신명神命에 부응하였다. 후에 부건이 황제를 참칭僭稱하였다. 그가 죽자 그 아들 부생苻生이 즉위했는데 흉포하니, 여러 신하가 그를 죽이고 부견을 세웠다. 에 를 보내 양양襄陽을 함락시켰고, 19년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정벌하였다. 100만이라 부르는 군사가 수륙水陸 양쪽으로 진격하여 항성項城에 진을 치니, 항성에서 장안長安까지 천리나 깃발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사람을 보내 진晉나라에 고하기를, ‘이미 진군晉君을 위해 장안성長安城 안에 장대한 집을 지어놓았고, 이제 일부러 대대적으로 강을 건너 맞이하러 왔으니, 날을 잡아 그 집에 들어가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사현을 파견하여 북쪽을 토벌하게 할 것을 논의하였는데, 사람들 사이에
찬반贊反 의견이 상당히 달랐다. 그런데 치초만은 말하였다.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내가 예전에 환선무桓宣武(환온桓溫)의 부府에서 〈사현과〉 함께 근무하였을 때 그가 모든 사람들이 모두 재주를 다 발휘하게 하여 비록 나막신을 신는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직임에 맞게 썼다. 이것으로 미뤄보건대 아마도 그는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사현이〉 큰 성공을 거두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치초가 선견지명이 있음에 탄복하였고, 또 그가
애증愛憎 때문에 〈사현의〉 장점을 가리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注+②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이때 저적氐賊이 강성하니 조정에서 북방을 진압시킬 수 있는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장수를 구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대장군 사안謝安이 말하기를, ‘형님의 아들 사현謝玄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중서랑 치초郗超가 그 말을 듣고 탄복하며 말하였다. ‘사안이 대중의 뜻을 어기고 친척을 추천한 것은 현명하다. 사현은 필시 그의 추천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注
◦ 왕세무王世懋:정사正史에 부견苻堅의 성을 ‘부苻’로 썼으니, 즉 포蒲가 변한 것이다. 마땅히 ‘부명符命’이라고 할 때처럼 〈부苻자의 ⺿를〉 죽竹자로 구성하여야 된다고 하지만 옳지 않다.
注
◦ 왕세무:석호石虎 때의 〈부견苻堅의〉 바른 성姓은 ‘포蒲’였으니 부랑符郞이라고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