汝南陳仲舉와 潁川李元禮二人을 共論其功徳이나 不能定先後러니 蔡伯喈評之曰
陳仲舉
는 彊於犯上
하고 李元禮
는 嚴於攝下
하니 犯上難
하고 攝下易
注+① 張璠漢紀曰 “時人爲之語曰 ‘不畏彊禦陳仲舉, 天下模楷李元禮.’”라하니
仲舉遂在三君之下
注+② 謝沈漢書曰 “三君者, 一時之所貴也. 竇武․劉淑․陳蕃, 少有高操, 海內尊而稱之, 故得因以爲目.”하고 元禮居八俊之上
注+③ 薛瑩漢書曰 “李膺․王暢․荀緄․朱寓․魏朗․劉佑․杜楷․趙典, 爲八俊.” 英雄記曰 “先是, 張儉等相與作衣冠糺彈. 彈中人相調, 言‘我彈中誠有八俊․八及, 猶古之八元․八凱也.’”
謝沈書曰 “俊者, 卓出之名也.” 姚信士緯曰 “陳仲舉體氣高烈, 有王臣之節. 李元禮忠壯正直, 有社稷之能. 海内論之未決, 蔡伯喈抑一言以變之, 疑論乃定也.”이라
注
劉云 “世說之作, 正在識鑒․品藻兩種耳. 餘備門類, 不得不有, 亦不盡然.”
17-1
여남汝南의
진중거陳仲舉(
진번陳蕃)와
영천潁川의
이원례李元禮(
이응李膺) 두 사람에 대해 〈사람들이〉 함께 그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해 보았지만 그
선후先後를 정할 수가 없었는데,
채백개蔡伯喈(
채옹蔡邕)가 그들을 평했다.
채옹蔡邕
“진중거는 윗사람의 면전에서 직언을 잘하고 이원례는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데 엄격하다. 윗사람의 면전에서 직언하기는 어렵고 아랫사람을 통솔하기는 쉽다.”
注+①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에 말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중거陳仲舉(진번陳蕃), 천하의 모범 이원례李元禮(이응李膺).’라고 했다.”
이리하여 진중거는 마침내
삼군三君의 아래에 놓이고,
注+② 사침謝沈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삼군三君’은 당시 존경받던 인물들이다. 두무竇武․유숙劉淑․진번陳蕃은 젊어서부터 고상한 지조를 지녔기에 천하 사람들이 존경하고 칭송하였다. 그러므로 〈삼군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원례는
팔준八俊의 위에 자리하게 되었다.
注+③ 설영薛瑩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이응李膺․왕창王暢․순곤荀緄․주우朱寓․위랑魏朗․유우劉佑․두해杜楷․조전趙典이 ‘팔준八俊’이다.”
왕찬王粲의 ≪영웅기英雄記≫에 말했다. “이에 앞서 장검張儉 등이 함께 관리들을 탄핵했는데, 탄핵 당한 사람들이 서로 농담하기를 ‘우리 탄핵 당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로 팔준八俊과 이 있으니, 〈우리는〉 옛날의 와 같네.’라고 하였다.”
사침謝沈의 에 말했다. “‘준俊’은 특출하게 뛰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요신姚信의 ≪사위士緯≫에 말했다. “진중거陳仲舉(진번陳蕃)는 기질이 높고 세차서 왕자王者의 신하가 될 만한 절조節操를 지녔다. 이원례李元禮(이응李膺)는 충성스럽고 굳세며 바르고 곧아서 사직社稷을 보위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천하 사람들이 〈그들의 우열에 대해〉 논했으나 판가름을 내지 못했는데 채백개蔡伯喈(채옹蔡邕)가 한번 말하여 바꾸었으니 분분하던 논의가 이에 결정되었다.”
注
◦ 유신옹劉辰翁:≪세설신어≫라는 작품저작의 중심은 〈식감識鑒〉과 〈품조品藻〉 두 편에 있을 따름이다. 나머지는 구색을 갖추는 데 없을 수 있지만 또한 다 그렇지만도 않다.